[新명인열전]“담양 산골짜기서 밀랍초 만들며 유유자적한 삶 누려요”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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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빈도림-이영희씨 부부

전남 담양군 대덕면 문학리 ‘빈도림꿀초’ 공방에서 빈 씨 부부가 밀랍 초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부부는 산골 공방에서 밀랍 초를 만들며 사는 삶에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전남 담양군 대덕면 문학리 ‘빈도림꿀초’ 공방에서 빈 씨 부부가 밀랍 초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부부는 산골 공방에서 밀랍 초를 만들며 사는 삶에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눈길에 찾아오기 쉽지 않을 텐데 괜찮겠어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다정다감했다. “특별히 뭘 보여 드릴 만한 게 없는데…. 시골 생활이 다 그렇잖아요.” 공방 안주인의 말투는 겸손하면서도 정갈했다. 인터뷰 일정을 잡고 지난달 28일 전남 담양의 산골짜기에서 밀랍으로 초를 만드는 공방을 찾아 나섰다. 공방은 안주인 말처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승용차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 갔지만 엉뚱한 마을이 나왔다. 다시 차를 돌려 담양∼곡성 간 지방도 60호선을 달리다 보니 도로 옆에 ‘빈도림꿀초’라는 조그만 푯말이 보였다. 푯말이 가리키는 산길을 따라 5분 정도 올라가다 결국 차에서 내려 걸어갔다. 눈이 녹지 않은 오르막길에서 차가 몇 번이나 미끄러져 고생깨나 했다.

힘들게 올라간 산 중턱의 그림 같은 하얀 집이 눈에 들어왔다. 현관 옆에 ‘東夢軒(동몽헌)’이라는 문패가 걸려 있었다. 세월의 더께가 느껴지는 문패는 고풍스러운 양옥과 잘 어울렸다.

○ 유유자적한 삶 누리는 부부

독일 출신의 귀화 한국인 빈도림 씨(64)와 이영희 씨(59) 부부가 이 집 주인이다. “동몽헌은 ‘동쪽(한국)을 꿈꾸는 집’이라는 뜻이에요. 제가 독일에서 살 때 집에 붙였던 이름인데 지금 이렇게 (한국에서) 잘살고 있으니 소망을 이룬 셈이죠.” 빈 씨의 한국말은 유창했다. 독일에서보다 한국 땅을 밟고 산 기간이 더 길다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억양에서 전라도 사투리가 묻어나는 영락없는 ‘전라도 아저씨’다.

베를린에서 태어난 빈 씨는 고등학교 때 우연히 조선시대 미술 작품을 접한 후 그 아름다움에 심취했다. 한국이란 나라에 매료돼 독일 대학에서 동양학을 전공했다. 1974년 서울대 국문과 대학원에 입학해 6년간의 유학생활을 끝내고 독일로 돌아갔다. 1984년 독일에서 한국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와 대구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강단에 섰다. 1992년 8년간의 교수 생활을 마치고 주한 독일대사관으로 자리를 옮겨 통역 일을 맡았다. 한국어에 능통하고 사교적인 성격의 그에게 한국과 독일의 주요 인사들을 연결해 주는 통역 업무는 즐거운 일이었다.

독일대사관에서 근무하면서 독문학을 전공한 이영희 씨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 씨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문명의 공존’ ‘휴머니즘 동물학’ 등 수십 권의 독일 서적을 한국어로 옮긴 번역가다. 빈 씨도 동양학에 조예가 깊어 원불교 경전을 번역하기도 했다.

빈 씨 부부는 우연한 기회에 담양군 대덕면 문학리 옥천골에 둥지를 틀었다. 대사관에 근무하던 1996년 화가인 한국인 친구에게서 담양의 땅을 구입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자급자족의 전원생활을 꿈꿔 왔던 부부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었다. 2000년 독일대사관 통역관 업무가 프리랜서로 바뀌면서 빈 씨는 시골 땅을 찾을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이때부터 부부는 주말을 담양에서 보냈다. 작은 텃밭을 만들고 작물을 가꿨다. 도시 생활에서 느끼지 못한 자연의 이치를 알 것 같았다. 2002년 부부는 미련 없이 서울 생활을 접었다.

“저희가 옥천골에 들어올 때 한 가구도 없었어요. 지금은 7가구나 들어왔으니 저희가 터줏대감인 셈이죠. 그래선인지 주민들이 저한테 자꾸 이장을 하라고 해요.” 빈 씨는 “20가구 정도 되면 한번 해 보려고 한다”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밀랍 초는 자연이 내린 선물

우연히 ‘담양살이’를 시작한 것처럼 밀랍 초와의 인연도 뜻밖이었다. 산골에 정착한 지 대 여섯 달쯤 지났을 때였다.

“추월산 자락에서 농사도 짓고 한봉도 키우는 마을에 가게 됐어요. 농부 아저씨가 평상에 앉아 꿀을 빨아먹고 입안에 남은 밀랍을 내뱉기에 꿀을 내리고 남은 밀랍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그게 필요한 사람이 없어서 그냥 버린다더라고요. 그게 시작이었어요.”

빈 씨는 그 자리에서 밀랍초를 떠올렸다. 어릴 적 벌집을 가열한 뒤 죽은 벌이나 애벌레 등 불순물을 제거하고 갖가지 모양의 틀에 담아 노란 초를 만드는 것을 봤던 기억을 더듬었다. 책과 인터넷 등의 정보를 토대로 초를 만들어 봤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독일까지 날아가 초 만드는 기술을 배워 왔다. 한국에는 파라핀으로 만든 양초가 들어오면서 신라시대부터 전해 오던 밀랍 초 명맥이 끊겼고 제작 과정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밀랍은 꿀벌의 배에 있는 납샘에서 분비되는 물질로 벌집의 주성분이다. 밀랍 1kg을 만들려면 벌이 꿀 4∼6kg을 먹어야 한다. 밀랍 초는 향이 좋고 색이 고울 뿐 아니라 무엇보다 몸에 해롭지 않다. 주위 사람들과 나눠 쓰려고 소박하게 시작한 초 만들기는 찾는 이가 많아지면서 점점 구색을 갖추어 갔다. 10년 전에는 번듯한 공방까지 지어 한결 작업하기가 수월해졌다. “밀랍이 하나하나 형태를 가진 초가 되면 추수하는 것 같이 마음이 넉넉해져요.” 이 씨의 밀랍 초 애찬론이다.

시제품을 내놓기까지 시행착오도 많았다. 밀랍을 몇 도에서 녹여야 하는지, 작업장 온도를 몇 도에 맞춰야 하는지, 몇 분을 건조시켰다가 다시 밀랍을 덧입혀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실험을 거듭했다.

작업은 밀랍을 정제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뜨거운 물에 넣어 녹이면 밀랍은 기름처럼 위에 뜨고 불순물은 가라앉는다. 위에 뜬 밀랍을 필터로 여러 번 걸러 알 껍질, 먼지 등을 제거한다. 심지를 따뜻한 담금통에 한번 넣으면 1mm 두께로 밀랍이 겉을 감싼다. 10분 정도 식힌 뒤 다시 넣고 또 식힌 후 넣기를 여러 번 반복하면 두꺼운 밀랍 초가 만들어진다.

“성당이나 교회, 사찰 등이 단골 거래처입니다. 요즘은 초가 어둠을 밝히는 것보다 장식용으로 쓰이기 때문에 일반 가정에서도 많이 찾습니다.” 연간 2억 원 정도 매출을 올린다는 빈 씨는 완제품 초를 찾는 이도 많지만 집에서 직접 초를 만들 수 있도록 밀랍과 용기, 심지로 구성해 놓은 세트도 인기”라고 말했다. 낮에는 마주 앉아 초를 만들고 뉘엿뉘엿 해가 지면 그 초에 불을 붙이는 재미로 살아가는 부부에게서 빠르게 돌아가는 문명에 편승하지 않는 ‘느림의 미학’이 느껴졌다.
▼ 담양 빈씨 1대 기록 “종친회도 나가야죠” ▼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사이 각별

빈 씨는 1974년 독일인 1호로 서울대 국문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대학원 시절 한 교수가 그에게 한국 이름을 선물했다. 독일 이름 디르크 핀들링을 한국식으로 발음한 ‘빈도림(賓道林)’. 한자를 풀면 ‘나그네(賓)가 숲(林)에서 길(道)을 찾다’이다. 15년째 담양의 산골짜기에서 살고 있으니 그의 삶은 이름대로 되었다.

그는 2005년 귀화하면서 담양 빈씨 1대가 됐다. 빈 씨의 본관은 달성, 수성, 대구 등이 있으나 모두 한 본이다. 그는 귀화-창성(倉姓)-개명 절차를 거치면서 빈씨 종친회에 연락을 했다고 한다. 빈 씨는 “종친회에 전화를 걸어 담양을 본관으로 하는 성을 써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허락해 줬다”며 “얼굴도 알리고 감사인사도 드릴 겸 조만간 종친회에 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2000년 4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베를린자유대를 방문해 남북한의 화해협력 의지를 담은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다. 김 대통령이 선언문을 작성할 때 빈 씨는 독일 통일의 과정과 내용을 소개하는 등 깊숙이 참여했다. 그는 손재주가 좋아 만드는 것마다 ‘작품’이 된다. 2008년 겨울 담양의 달뫼미술관에서 밀랍의 부드러운 힘을 보여주는 설치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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