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이전 위헌]‘국가 주요관습’ 헌법적 가치 인정

  • 입력 2004년 10월 22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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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21일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관습헌법’을 근거로 내세워 이에 대한 논란이 뜨거워지고 있다. 헌재 결정문 내용과 권위 있는 헌법학자들의 설명을 토대로 관습헌법이 어떤 것인지, 성문헌법과 같은 효력이 인정되는지, ‘수도=서울’이 과연 관습헌법에 해당되는지 등에 대해 종합적으로 점검해본다.》

헌재가 근거로 내세운 관습헌법은 ‘헌법적 관행’을 뜻한다.

하지만 헌법적 관행이 모두 관습헌법이 되는 것은 아니며, 일정한 요건이 엄격히 충족돼야 한다는 게 헌재의 판단이다. 헌재가 ‘수도=서울’을 강제력 있는 헌법규범인 관습헌법으로 인정한 것은 바로 이런 요건을 충족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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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습헌법의 정의=관행으로 굳어진 관습이 사회규범으로서 사회생활을 규율할 때 그것을 관습법이라고 한다. 관습법의 존재는 법 이론과 법 해석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성문법으로 모든 사회현상을 빠짐없이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상법 1조는 ‘상사(商事)에 관하여 상법에 규정이 없는 때에는 우선 상관습법에 의하고 상관습법이 없으면 민법의 규정에 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성문화된 민법보다는 관습법을 우선시한 것이다.

헌법에서도 관습헌법의 개념이 있다. 한국과 같은 성문(成文·문장으로 나타냈다는 의미)헌법 국가인 독일은 ‘관습적 헌법’과 ‘헌법적 관행’을 구분한다. 관습적 헌법은 영국처럼 성문 헌법전이 없는 나라의 불문(不文)헌법을 의미하지만, 헌법적 관행은 성문헌법 국가에서 보충적 기능을 하는 헌법관습법을 뜻한다. 예를 들어 국기, 국가(國歌), 수도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할 수 있다.

▽헌재가 밝힌 관습헌법의 요건=헌재의 위헌 결정에 대해 일부 법조인들은 “헌재가 너무 광범위하게 관습헌법 개념을 인정한 것 아니냐”고 비판한다.

하지만 헌재는 관습헌법이 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요건을 만족시켜야 한다면서 ‘수도=서울’은 이런 기준을 충족시킨다며 결정문에 그 ‘기준’을 제시했다.

먼저 관습헌법이 성립되려면 그 내용이 헌법에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일반 법률에 대해 우위를 가져야 할 만큼 중요하고 실질적인 사항(중요성)이어야 한다는 게 헌재의 판단이다. 국가 조직이나 구성에 관한 사항 등 일반적인 헌법사항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사항이 대상이 된다는 것.

다음으로는 그 내용에 대한 관행이나 관례가 존재하면서도 모든 국민이 그 존재를 인식하고 인정할 만큼 충분한 기간 계속(반복 계속성)돼야 하며, 중간에 반대되는 관행이 이뤄져서는 안 된다(항상성)는 것이다.

또 이런 관행은 내용이 명확(명료성)해야 하며, 국민의 승인이나 확신, 합의를 얻은 것(국민적 합의)으로 국민이 관습헌법으로서 강제력을 갖는다고 믿어야 한다고 헌재는 설명했다.

▽‘수도=서울’이 관습헌법인가=헌재는 수도가 서울로 정해진 것은 이런 관습헌법의 요건을 모두 갖춘 것이라고 밝혔다. 그 내용이 조선시대 이래 600여년간 국가생활에서 전통적으로 형성된 계속적이고 변함없이 지속된 관행이고, 서울이 수도라는 사실은 국민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명확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또 수도 서울은 헌법제정 이전부터 오랜 역사와 관습에 의해 국민에게 법적 확신이 형성된 사항이자 헌법 체계에 전제된 가장 기본적인 규범의 일부라고도 판단했다. 게다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국민이 실효성과 강제력을 갖는다고 믿고 있는 기본사항이라는 점도 고려됐다.

결국 서울이 수도라는 것은 단순한 사실 명제가 아니고 헌법적 효력을 지니는 불문의 헌법규범으로 정착된 것으로 봐야한다는 게 헌재의 입장이다.

‘서울은 한국의 수도’라는 사실 명제에서 논리적 비약을 거쳐 ‘서울은 한국의 수도여야 한다’는 당위(當爲) 명제를 이끌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 헌법적 관행이 오랜 기간 그 ‘규범력’에 대한 다툼 없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것이고, 그 규범성은 사실 명제 뒤에 잠재돼 있었던 것뿐이라는 해석이다.

이상록기자 myzodan@donga.com

▼외국의 경우…범죄용의자 권리규정 ‘미란다 원칙’▼

관습법은 현행 상법, 민법 등에서도 인정되고 있다. 관습법의 존재는 법 이론과 해석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하지만 관습헌법에 대한 국내 연구는 활발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 장영수(張永洙) 고려대 법대 교수는 22일 “관습헌법에 대한 국내 연구자료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성문헌법 국가인 한국에서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번 헌법재판소의 결정에서처럼 관습헌법을 인정한 사례는 외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1980년대 “정부 공공기관의 토지나 건물에 십계명 등 종교적 상징물을 게시하는 것은 특정 종교 창립이나 지지를 금지한 연방헌법 수정 1조 위반으로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종교적 상징물의 일종인 크리스마스트리를 설치하거나 동전이나 지폐에 ‘신을 믿는다’(in god we belive)는 문구를 넣은 것은 위헌이 아니라고 했다. 이는 건국 이후 전통적으로 인정된 역사적 기념물로, 역사적으로 확립된 관행이기 때문이라는 것.

이 경우 관습헌법적 요소가 성문헌법을 일부 보완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또 다른 사례는 경찰이나 검찰이 범죄용의자를 연행할 때 그 이유와 변호인 조력권, 진술거부권 등이 있음을 미리 알려주어야 한다는 ‘미란다 원칙’. 이 원칙은 1966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확립된 것이다.

당시 대법원은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고지(告知) 받지 못했다며 납치 강간 혐의로 체포돼 조사를 받고 범행을 자백한 멕시코계 미국인 에르네스토 미란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미란다 원칙은 명문 규정이 없는 관습헌법의 일종으로 굳어졌다.

이상록기자 myzod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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