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반인륜범죄 공소시효 없애야"

  • 입력 2002년 1월 7일 18시 23분


“15년 동안이나 간첩 가족으로 몰려 처절한 삶을 살아왔는데 책임자들을 처벌할 수 없다니 말이 됩니까. 세월이 흘러도 용서할 수 없는 반인륜적 범죄는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간첩으로 몰렸던 수지 김(본명 김옥분·金玉分)의 유족들이 87년 ‘수지 김 살해 은폐조작 사건’을 주도한 것으로 밝혀진 장세동(張世東)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에 대한 처벌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에 나서기로 했다.

또 민주당 함승희(咸承熙) 의원은 최근 수지 김 사건과 서울대 최종길(崔鍾吉) 교수 의문사 사건 등 반인륜적, 반사회적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하는 특별법을 입법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처럼 공소시효가 만료된 주요 사건의 책임자 처벌을 가능하게 하려는 각계의 움직임이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공소시효에 막힌 처벌〓‘공소시효’는 법적 사회적 안정성 등을 위해 범죄를 저지른 날로부터 일정기간이 지났을 때 그 사건에 대한 공소제기를 할 수 없도록 한 제도. 장 전 부장에게 적용되는 범인 도피나 직무유기 혐의는 공소시효가 7년이기 때문에 형사처벌은 불가능하다.

수지 김의 유족들이 직접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유족들은 이번 주부터 장 전 부장의 처벌을 촉구하는 대국민 서명운동에 돌입하고 인터넷에도 서명운동사이트를 개설할 예정이다. 이들은 또 사건의 은폐 및 왜곡에 따른 정신적 고통의 책임을 물어 국가와 장 전 부장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민사소송의 소멸시효는 사건이 발생한 날로부터 10년, 상대방의 위법 행위를 알게 된 날로부터 3년이기 때문에 이 역시 ‘시간’의 문제에 걸려 기각될 것으로 예상된다.

▽“반인륜적 범죄, 반드시 처벌해야”〓공소시효 문제는 과거 이근안(李根安)씨 고문사건이나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에서도 제기돼 왔다. 법조인들은 진실 규명과 피해자의 인권을 위해서도 이 같은 법적 한계에 손댈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장 전 부장의 경우 2000년 수지 김 사건에 대한 내사를 중단시킨 혐의로 지난해 말 구속된 이무영(李茂永) 전 경찰청장과의 형평성 논란도 일고 있다.

조시현(曺時顯) 성신여대 법대 교수는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 행위에 대해 공소시효를 원용하는 것은 국가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고 사실상 면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국제 판례와 전문가 제언〓국제사회는 인권을 위협하는 특정범죄에 대해서는 ‘시효에 관계없이 끝까지 처벌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유엔 총회는 1968년 뉘른베르크 헌장을 원용,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 시효 부적용에 관한 협약’을 채택했다.

박찬운(朴燦運) 변호사는 “유럽에서도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서는 시효를 두지 않는다”며 “국제법 취지 등을 고려해 반인권적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도록 국내법을 정리하거나 이를 규정한 특별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정부는 95년 ‘헌정질서 파괴 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을 제정, 형법상 내란죄와 외환죄 및 집단 살해죄 등에 대해 공소시효의 적용을 배제하도록 규정한 바 있다. 또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역시 국가의 소추권이 막혔던 기간에 대해 공소시효를 중단했다.

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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