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서동일]아랍의 ‘민주화 태양’이 식어간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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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이집트 혁명 당시 시민들이 혼잡한 거리를 휴대전화로 찍고 있다. 당시 이집트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현재 이집트 사회에는 정치적 무관심이 팽배하다. 가디언 홈페이지
2011년 1월 이집트 혁명 당시 시민들이 혼잡한 거리를 휴대전화로 찍고 있다. 당시 이집트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현재 이집트 사회에는 정치적 무관심이 팽배하다. 가디언 홈페이지
서동일 카이로 특파원
서동일 카이로 특파원
신문 구하기가 어려웠다. 신문을 어디서 파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신문을 구하려고 서점과 편의점을 찾아다닌 지 이틀 만에 자그마한 신문 가판대를 둔 상점을 겨우 찾았다.

“한 달 치 신문 값을 한꺼번에 내겠다. 매일 신문을 챙겨 놓아 달라”고 하자 주인은 의외라는 듯 살짝 웃었다. 주인은 “요즘은 신문 보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신문 대신 인터넷이나 모바일로 뉴스를 본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회·정치적 이슈에 아예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중동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아직 민주화 시민혁명 ‘아랍의 봄’부터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현실은 많이 달라졌다. 2011년 정부의 부정부패와 독재, 부의 불평등에 맞서 들불처럼 일었던 뜨거움은 이미 식은 지 오래다. 정치적 무관심만이 팽배하다.

2011년과 현재의 달라진 분위기를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설문조사 결과를 최근 찾았다. 카타르에 있는 ‘아랍조사정책연구센터’가 2011년부터 매년 발간하고 있는 ‘아랍 여론 지수(The Arab Opinion Index)’다. 올 5월에도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집트, 이라크 등 아랍 11개국 1만8830명을 직접 인터뷰한 뒤 2017∼2018년 보고서를 발표했다.

정부 신뢰도가 형편없기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10명 중 3명은 정부와 의회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신뢰가 부족하다”는 대답까지 포함하면 정부를 불신하는 비율은 절반이 넘는다. 나라 전체에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다는 불만도 컸다. “부정부패가 없다”(6%)고 한 응답자는 소수였다. “법이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52%) “공정한 재판이 이뤄져야 하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38%)고 한 응답자도 상당수였다. 정의로운 국가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 정부에 대한 두려움은 커졌다. 지금도 아랍 국가에서는 정부에 비판적인 의견을 소셜미디어에 표현했다가 거액의 벌금을 물거나 체포되는 경우가 많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랍센터 조사 응답자 중 37%가 (정부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었다. 정부의 보복 때문이다. 이는 2011년(27%)에 비해 10%포인트나 늘어난 수치다.

이집트는 ‘국가 안보나 경제에 위협이 되는 온라인 활동을 감시하고 처벌하겠다’며 특정 웹사이트를 수시로 차단하거나 운영자에게 거액의 벌금을 물리고 있다. 지난달에는 5000명 이상의 팔로어를 가진 소셜미디어 계정을 감시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가제트뉴스 등 이집트 신문 1면은 매일 압둘팟타흐 시시 이집트 대통령 사진이 차지한다.

정부의 무소불위 권력을 견제할 방법은 사실상 선거밖에 없지만 아랍 국가 유권자들은 회의론에 빠진 모양새다. 투표율이 계속 떨어진다. 5월 요르단 총선 투표율은 37%에 그쳤다. 같은 달 이라크 총선 투표율은 44%였다. 사담 후세인 정권이 퇴출된 2003년 이후 투표율이 60% 아래로 떨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랍 여론 지수 조사에서도 “다가오는 선거에 참여할 생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절반에 가까운 46%가 “없다”고 답했다. 유권자들이 정치적 열망을 잃었다는 뜻이다.

“이집트 국민은 더 이상 신문을 안 본다”고 말한 상점 주인은 “우리는 가족 친구들과 행복할 수 있게 돈만 잘 벌면 된다. 더 이상 신에게 바라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비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부에 더 이상 분노하지 않고, 돈 잘 버는 일만 신께 빌고 있다.

기도 덕분인지 이 국가들의 살림살이는 조금 나아졌다. “가계소득이 최소한의 지출을 하기에도 부족하다”는 답변이 40%(2011년)에서 조금씩 줄어 올해 30%까지 내려왔다. “저축을 하고 있다”는 비율은 7%포인트, 그럭저럭 소득과 지출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비율도 4%포인트 늘었다.

그러나 밥과 옷이 전부는 아니다. 트위터 한 줄 마음대로 적지 못하는 아랍 국민들의 모습을 보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자유 평등과 같은 기본권 역시 삶의 질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식어버린 이들의 마음에 불을 지필 계기는 언제, 어디에서 다시 시작될까.
 
서동일 카이로 특파원 dong@donga.com
#아랍의 봄#이집트 혁명#시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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