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0개 비석 한데 모아 이름없는 조선 도공들 넋 기려

유덕영기자 입력 2015-10-19 03:00수정 2015-10-19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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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32>무명 도공들의 흔적
일본 사가 현 이마리 시 오카와치야마 ‘비요의 마을’에 있는 도공무연탑. 마을 주민들이 조선 도공을 비롯해 이름 없이 마을 곳곳에 버려진 도공들의 비석 880개를 모아 만든 석탑이다. 맨 꼭대기에 스님 모습의 지장보살을 세워 놓았다. 이마리=유덕영 기자 firedy@donga.com
임진왜란 때 왜군들에 의해 끌려간 조선인들의 삶은 처참했다. 참혹한 인신매매도 있었다. 민덕기 교수(청주대)는 ‘납치된 조선인들은 일본에서 어떻게 살았을까’란 글에서 정유재란을 직접 따라다니며 기록한 일본인 승려 게이넨(慶念)의 ‘조선일일기록’을 인용해 이렇게 전한다.

‘(일본군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조선인들을 사들여서는 새끼줄로 목을 줄줄이 엮어 묶은 후 빨리 가게끔 몰아댔다. 혹 잘못 걷기라도 할라치면 몽둥이로 내리치며 내모는 그 모습은 지옥에서 무서운 귀신이 죄인을 다루는 것이 저럴 것인가 여겨지게까지 하였다…(조선인들을) 원숭이처럼 엮어 묶어서는 짐을 지우고 마구 볶아대는 모습은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도공들이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재일(在日) 한국인으로서 장편기록영화 제작 등의 활동을 하는 이의칙 프로듀서는 2011년 ‘도자기의 도(道)’라는 책에서 임진·정유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들의 애환을 이렇게 전한다(정구종 ‘한일교류 2천년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에서 재인용)

‘1598년 겨울, 조선 철수 때 후방 부대 역을 맡았던 시마즈 군(軍)은 납치한 조선인들을 세 척의 배에 나눠 태우고 달아났다. 그러나 본선(本船)을 놓쳐 20여 명이 탄 배 한 척이 가고시마 만 안의 마에노하마에 표착하여 성밖 들판에서 살게 되었다. 이곳에는 아직도 ‘고려초(高麗町)’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조선인 포로들은 처음에는 무사나 상인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느라 도공으로서 솜씨를 발휘할 수 없었다. 그들이 영주의 명으로 정착한 것은 한참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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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도공 백파선

이의칙에 따르면 또 한 무리 조선인 도공들은 사쓰마 반도 동쪽 해안 가미노카와 부근에 상륙했는데 성이 신(申) 김(金) 노(盧)씨로 전해진다고 한다.

이들은 영주의 비호 아래 찻잔을 제작했다. 또 다른 43명의 포로는 여기서 수십 km 떨어진 곳에 정착했는데 주로 서민들이 쓰는 옹기 그릇 접시 잔을 만들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렇게 해서 성공한 조선 도공들은 일본에서 ‘도자의 신’으로 대접받는 이삼평(31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수백 명의 도공을 이끌었던 여성 도공 백파선(百婆仙)도 있고 지금도 유명한 오이타(大分)의 다카토리(高取) 도자기를 연 팔산(八山), 구마모토(熊本)의 고다(高田) 도자기와 후쿠오카(福岡)의 아가노(上野) 도자기의 창시자인 존해(尊楷) 등도 모두 일본에서 이름을 날린 조선의 도공들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많은 사람은 낯선 땅에 끌려와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이름 없는 도공들이었다.

이삼평이 고령토 광산을 발견한 사가(佐賀) 현 아리타(有田)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이마리(伊萬里) 시 오카와치야마(大川內山)는 수많은 조선 도공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비밀스러운 도자기 마을이란 뜻의 ‘비요(秘窯)의 마을’로 불리는 오카와치야마로 떠나 본다.

○ 비요의 마을

오카와치야마 마을로 들어서면 곳곳에 도자기들이 널려 있어 한눈에 ‘도자기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곳이 ‘비밀스러운 마을’로 불리게 된 것은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외진 산골짜기에 있다 보니 지금도 버스 운행 횟수가 많지 않아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그 옛날 조선 도공들이 정착했던 300∼400년 전에는 거의 고립생활을 했으리라 짐작이 된다.

이런 곳에 도자기 마을을 조성한 이는 이삼평을 데려왔던 나베시마(鍋島) 영주 가문이었다. 남들보다 디자인과 품질이 뛰어난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도자기’ 개발에 착수한 나베시마 가문은 1675년 아리타에 있던 도공들을 데리고 이 깊은 산속으로 들어와 엄격한 관리하에 비밀의 도자기 제작에 착수한다. 실제로 가 본 마을은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을로 접근하는 길 하나만 통제하면 외부인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이 가능해 보였다.

나베시마 가문은 엄격한 경쟁 시스템을 도입해 기술이 부족한 도공들은 쫓아내고 실패한 작품들도 보안을 위해 모두 파손 처리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도자기들은 일반에는 팔지 않고 천황 가(家)와 쇼군에게만 헌상하고 선물하는 데에 썼다. 마침내 마을은 최고의 도자기들을 만들어내는 곳으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이렇게 이어온 가마들이 지금도 30여 곳에 달한다.
올해 5월 이마리에 살고 있는 일본인 도공들이 ‘고려인의 비’ 앞에서 공양을 하는 모습. 매년 5월이면 마을 주민들은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해준 조선 도공들의 공덕을 기리며 제사를 지낸다. 이마리 나베시마도자기협동조합 제공
○ 곳곳에 조선 도공들의 흔적

‘비요의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산자락을 타고 죽 줄지어 있는 수많은 도자기 상점들을 만날 수 있는데 하나하나가 고풍스러워 그 자체로 구경거리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두 개의 유적지가 있으니 하나는 무명 조선 도공들의 영혼이 서린 ‘도공무연탑(陶工無緣塔)’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매화동산에 있는 ‘고려인의 비’였다.

‘도공무연탑’은 글자 그대로 연고 없는 도공들의 비석들을 한곳에 모아 네모 뿔 모양으로 차곡차곡 쌓은 뒤 맨 꼭대기에 스님 모습의 지장보살을 세워 놓은 석탑이었다. 마을 곳곳에 버려진 아무도 찾지 않는 도공들의 무덤을 보고 안타깝게 여긴 주민들이 1938년 880개의 비석을 한곳에 모아 탑을 쌓았다고 한다. 안내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300년에 이르도록 할아버지 아버지의 비기(秘技)를 계속 이어온 세공인(細工人)을 비롯해 도움을 준 가마의 사람들과 이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고려인을 모신 묘로 매년 봄이 되면 이곳 주민들은 공양을 올리고 800여 석주의 영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기자는 안내문을 읽어 내려 가면서 낯선 땅에 끌려와 힘든 삶을 살았을 조상들 생각에, 그리고 그것을 잊지 않고 수백 년 동안 영혼을 달래준 일본인들의 마음에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세월에 닳아 모서리가 무너지고 빛이 바랜 비석들을 자세히 보니 대부분 묘비명이 다 지워져 있었고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들도 얼핏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이마리 나베시마도자기협동조합 하라 다카노부(原貴信) 씨는 “탑을 만들 당시 마을 사람들은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도공 조상들이 있기에 우리 마을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잘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국적에 관계없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탑을 쌓아 올렸다”고 했다.

비요의 마을이 자랑하는 두 번째 유적인 ‘고려인의 비’는 이 탑에서부터 마을 아래쪽으로 10분쯤 걸어가면 보인다. 작은 다리 ‘고려교’를 지나 야트막한 계단 위로 오래된 단풍나무 아래 비석 2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이 중 하나가 조선 도공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인의 비’이다. 두 개 중 오른쪽 것은 훗날 마을 주민들이 세운 기념비라고 한다.

‘비요의 마을’ 도공들은 매년 5월 15일 이곳을 찾아 이국땅에 기술을 전하고 이름 없이 사라져 간 조선 도공들에게 감사의 의미를 담아 공양을 드린다고 한다. 비 인근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가마를 운영하고 있는 오구시 히데노리(大串秀則) 씨는 “이삼평 선생을 비롯한 조선 도공들이 이곳에서 자기를 굽기 시작한 덕택에 우리도 자기를 구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나 역시 매년 열리는 조선 도공 추모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 메이지 유신의 종잣돈을 만든 도자 수출

몇백 년 전 조선 기술자들에 대한 감사함을 아직까지도 잇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만나니 장인정신을 중히 여기는 일본의 뿌리가 느껴졌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일본에서 성공한 조선 도공들은 비록 타향에서 힘든 삶을 살기는 했어도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기술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장을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정작 자신들의 고향인 조선 땅에서는 천민으로 대접받으며 무시당하면서 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달랐다. ‘비요의 마을’을 만든 나베시마 가문처럼 지방의 최고 통치자들이 직접 도공들을 관리했다. 사쓰마(지금의 가고시마) 지역을 다스리던 시마즈 영주는 일본 원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조선 도공 마을을 따로 만들어 주었을 정도였다. 이름과 말도 조선어를 그대로 쓰도록 했으며 복장과 풍습도 지켜 나가도록 허용했다. 도공들은 나름대로 정체성을 잃지 않고 독자적인 생활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 도공들을 극진히 대우했던 사쓰마 번은 도자기 수출로 엄청난 부를 쌓아 일본 근대화에서 가장 선두에 설 수 있었다.

일본 도자 문화가 조선 도공들 덕분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이들의 능력을 알아보고 적극 지원했던 관(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1600년대 중반, 중국이 도자기 수출을 중단하면서 일본 도자기는 세계로 뻗어 나가는 계기를 만난다. 일본은 도자기를 통해 유럽과 활발한 교류를 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막부가 무너지는 정치적 격변기를 겪었고, 대외적으로는 아시아에서 근대화에 가장 먼저 성공할 수 있었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 전까지 외국에서 수출해 벌어들인 돈의 90%가 도자기를 수출한 돈이었다. 메이지 유신을 가능케 했던 종잣돈은 바로 도자 수출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마리=유덕영 기자 fir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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