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낚시 좋아하는 해외 바이어가 오셨다… 잠수부 동원해 광어-다금바리 몰래 풀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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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한국 숨은 주역… VIP 의전 여행사 ‘코스모진’ 직원들 24시

나는 여행사 직원이다. 하지만 평범한 여행사 직원은 아니다. 외국인 VIP를 대상으로 국내 여행 일정을 짜주는 VIP 의전 여행사 ‘코스모진’의 직원이다.

국내 대기업, 정부기관들이 중요한 계약이나 행사를 앞두고 초청하는 거물들이 우리 고객이다. 한 국가의 정상부터 유튜브 공동 창업자 스티브 첸 같은 글로벌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 아랍 공주, 섹시 할리우드 스타 제시카 알바, 이종격투기 선수 표도르 에밀리아넨코가 고객이었다. 어렵게 모신 VIP의 국내 일정이 얼마나 원활히 진행되느냐에 따라 안 풀리던 계약이 성사될 수도 있고, 좋던 관계가 나빠질 수도 있다. 돌발변수는 언제든 생길 수 있으므로 늘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하고 긴장해야 한다.

우리 회사에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많다. 국내 기업의 초청으로 한 글로벌 기업의 사장이 왔을 때 일이다. 낚시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해 제주도에서 요트를 빌려 낚시체험 코스를 마련해 뒀다. 준비를 마쳤는데 갑자기 ‘고기가 잘 안 잡히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겼다. 분위기는 가라앉을 것이고 다들 좌불안석이 될 게 뻔했다. 마음이 급해진 담당자들은 당장 작은 배 한 척과 잠수부 2명을 섭외해 요트 근처에 광어, 쥐치, 다금바리 등을 풀어놓았다. 믿기는 어렵지만 당시 잠수부는 “낚싯바늘에 고기를 직접 끼우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낚싯대를 던지는 족족 고기가 잡히자 분위기는 무척 화기애애했고 두 기업의 유대도 돈독해졌다.

우리는 ‘되는 걸 되게 하는 건 누구나 한다. 안 되는 것도 되게 해야 차별화할 수 있다’는 철칙으로 고객을 모신다. 중동 지역에서 사업권을 따려던 국내 대기업이 해당 국가 고위공무원 내외를 초청했을 때의 일이다. 모든 일정이 잘 끝났는데 출국 두 시간을 남겨놓고 부인이 “며칠 전 먹었던 스몰피시를 구해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다.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도대체 ‘스몰피시’가 뭔지 다들 머리가 터지기 일보 직전, 부인이 찾는 것이 한국식 멸치조림이란 걸 알아낸 담당자는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근처 마트로 달려갔다. 그리고 급히 마련한 마른멸치를 호텔 주방장에게 부탁해 볶은 뒤 고급 용기에 담아 출국 직전 전달했다. 한 달 후 부인의 친필 감사편지가 회사로 도착했다. 해당 지역에서 우리 고객 기업의 사업이 순항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 출국직전 VIP ‘스몰피시’ 주문에 멸치?… 재빨리 볶아 공항서 전달 ▼

A전자 바이어가 입국하면 경쟁사인 B전자 간판조차 안 보이는 곳으로 동선을 짜서 이동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호텔 객실 내 전자제품이 뭔지 확인하고 다를 경우 바꿔놓는다. VIP가 원한다면 매진된 한류 아이돌 콘서트 티켓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구한다. VIP가 무심코 하는 질문에도 능숙하게 답변할 수 있도록 며칠간 준비를 한다. 마케팅팀에서 해당 VIP와 관련 업종에 대해 광범위하게 조사한 내용을 달달 외우다시피 하고 나간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VIP라면 차에 타는 순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오게 한다.

우리 회사는 가이드는 물론이고 운전기사까지 모두 정직원을 쓴다. VIP를 모시러 나간 자리에 청바지나 반바지, 슬리퍼를 끌고 나타난 자유분방한 가이드와 운전기사들을 보고 기겁한 경험이 있어서라고 한다. 운전기사들은 절대로 불필요한 차선 바꾸기를 하지 않도록 교육받는다. 외국 VIP들은 한국 운전자들의 현란하고도 거친 운전습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일종의 위협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필요할 때는 순발력 있게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기본적으론 늘 옆에 있되 튀어서는 안 되는 ‘그림자’들이다. VIP들이 특급호텔에서 식사를 할 때 우리는 일정을 확인하며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운다. 가끔 와서 같이 먹자고 하는 고객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겸상은 안 된다. 일할 때만은 ‘고객과 우리는 격이 다르다’라는 원칙을 되새긴다.

서글플 때도 많다. 새벽에 갑작스러운 공항 픽업 요청이 와서 자다 말고 인천공항으로 달려가는 건 어려움 축에도 끼지 못한다. 한 선배는 사전에 정해 놓은 일정대로 VIP를 남대문시장에 모시고 갔다가 ‘F’자가 난무하는 욕을 들은 적도 있다. 다짜고짜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렇게 냄새나고 더러운 곳에 데려왔느냐”는 거였다. 사실 이런 터무니없는 불평은 기업 간 협상이 잘 안 풀릴 때 의전에 대해 꼬투리를 잡아 빠져나가려는 속셈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런 황당한 욕까지 기꺼이 뒤집어쓰는 것, 그게 또한 우리의 역할이다.

준비해둔 전세 차량에서 갑자기 기름이 샌다거나, 공항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도 VIP가 나타나지 않거나, 100명 예약한 저녁 만찬장에 달랑 5명이 나타난다거나 하는 돌발 상황들은 언제나 피를 말린다. 이런 전설적인 악몽을 다 겪어본 모 차장은 중요한 일정이 시작되기 직전엔 하루에 담배를 6갑씩 피운다. 가끔 ‘나 죽으면 회사 앞에 조그만 동상 같은 거라도 세워 줄까?’ 하고 혼잣말을 하기도 한다.

자, 이쯤하면 이 고생을 해가면서 왜 여기서 일하는지 궁금증이 들 만할 것 같다. 을(乙) 중의 을이고, 사생활도 없고, 연봉도 별로 많지 않다. 기업에선 경비를 가능한 한 줄이고 싶어 하기 때문에 갖은 고생을 하여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해서 특별히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름다운 대한민국의 볼거리와 먹을거리, 좋은 인상을 외국 VIP들에게 알린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을 갖고 일한다. 우리 회사에는 정말 다양한 직원이 있다. 한국인과 결혼해 한국 문화에 푹 빠진 네덜란드인도 있고, 주한미군 출신도, 그 좋다는 교직을 그만두고 온 직원도 있다. 다들 VIP 일정에 맞춰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함께 회식 한번 하기도 어렵지만 보람이 있기 때문에 열정적으로 일한다.

우리 회사는 정명진 대표(40)가 VIP 의전 관광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2001년 국내 최초로 설립한 뒤 매년 30% 이상 성장하고 있다. 50여 명의 직원에 작년 매출은 40억 원쯤 된다. 삼성, LG, 현대, 두산, 포스코 등 국내 유수 대기업들이 우리 고객이다. 해외로 뻗어가는 우리 기업이 늘어난 만큼 초청 손님들을 전문적으로 관리해 달라는 수요도 계속 늘고 있다. 우리 기업이 잘돼야 우리가 잘되고, 우리가 잘해야 우리 기업도 잘된다. 대표가 강조하는 ‘올웨이스 온(Always On·24시간 깨어 있으라는 의미)’을 모토로 오늘도 밤낮없이 일하는 우리는 세계로 뻗어 나가는 한국 기업들의 든든한 후방부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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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VIP 의전 여행사#코스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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