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금융위기]<3>‘독립 IB 몰락’ 뭘 배울 것인가

  • 입력 2008년 9월 24일 03시 06분


“월가 IB는 저물어도 세계 IB시장은 지지 않는다”

미국 투자은행(IB) 업계 1∼5위인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메릴린치 리먼브러더스 베어스턴스 모두가 다양한 방식으로 독립 IB에서 벗어났다. 이로써 대공황 이후 1933년부터 상업은행에서 분리된 뒤 독자적 영역을 구축해온 ‘독립 IB’의 시대는 끝났다. 이들이 주도해온 ‘월가 시스템’도 대대적 정비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성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식 IB로의 도약을 꿈꾸던 한국 금융회사들로서는 당황스러운 국면이다. “금융산업 발전 모델을 재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런 논란과 관련해 다수의 국내외 금융 전문가들은 사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월가 시스템’의 문제점은 타산지석으로 삼되, 걸음마 단계에 있는 한국 IB 부문의 싹을 자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독립 IB 붕괴를 시장붕괴로 혼동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사태 이전까지 이어진 미국의 10년 장기호황 때 IB들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보기술(IT) 분야 등의 신성장 산업에 막대한 자금을 조달했고, 이들이 만든 고위험 고수익 금융상품에 투자해 돈을 번 개인들은 적극적인 소비를 통해 미국의 내수를 떠받쳤다.

그만큼 충격도 컸다. 미국 언론이 IB의 붕괴를 ‘금융시스템의 붕괴’로 받아들이는 것도 이런 점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한국에서 진행되는 논의에서 ‘독립 IB의 붕괴’가 ‘IB 시장의 붕괴’로 혼동되고 있다고 금융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장보형 수석연구원은 “독립 IB가 무너지면서 파생상품 시장은 다소 위축되겠지만 IB 본연의 업무인 회사채 발행 주선, 기업공개(IPO), 인수합병(M&A) 자문 등의 시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상업은행보다 리스크(위험)를 더 감수하며 투자자와 기업을 연결해주는 IB들의 ‘자금시장 조성자(마켓 메이커)’ 역할은 상업은행에 흡수된 뒤에도 여전히 유지된다는 뜻이다.

김희동 동양종금 상무는 “파생상품은 위험을 과학화 계량화해 관리하는 기법이 발달하면서 나타난 것인 만큼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이 시장도 회복될 것”이라며 “과거에도 미국의 롱텀캐피털 매니지먼트(LTCM) 사건, SK증권의 다이아몬드 펀드 사건 등 파생상품 관련 사건이 있었지만 시장은 계속 성장했다”고 말했다.

오히려 홍콩 인도 등의 금융회사들은 이번 사태를 자국 IB 역량 강화의 기회로 삼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메릴린치 인수 소식이 전해진 불과 몇 시간 뒤 인도의 금융회사 앰빗은 5명의 메릴린치 본사 직원을 채용했다. 홍콩 금융가에서도 리먼브러더스 직원들에 대한 스카우트 바람이 불고 있다.

○ 민간 금융회사들 “그래도 IB로 간다”

금융 전문가들은 금융업종 간 장벽이나 IB에 대한 규제가 거의 없는 미국의 상황과 한국 금융시장의 상황은 대단히 다르다는 점도 지적했다. 한국은 내년 2월에야 자본시장통합법을 시행해 파생상품 관련 규제를 완화하고, 업종 간 벽을 다소 낮출 계획이다.

LG경제연구원 신민영 금융연구실장은 “미국 사태를 보며 효과적인 관리감독의 중요성을 깨닫는 건 중요하지만 ‘상업은행이 IB보다 우월하다’는 식으로 방향을 급선회하는 건 금융산업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 금융회사들은 여전히 IB 분야의 경쟁력을 더 키워야 한다는 지적이다.

블룸버그가 발표한 한국의 상반기(1∼6월) M&A 자문 부문 순위에서 순수 한국 금융회사는 10위권에 한 곳도 끼지 못했다. 시장 1위는 64억5800만 달러 규모(시장 점유율 24.3%)의 M&A를 성사시킨 호주계 IB 맥쿼리였다.

이런 점 때문에 ‘IB 업무 강화’를 추진해온 금융회사들 중 대부분은 이번 사태 이후에 ‘위험 관리 역량’을 강화하면서 IB 부문의 역량 강화를 계속 추진할 방침이다.

대우증권 IB사업추진단 이건표 전무는 “미국과 국내 상황이 다른 만큼 IB 부문을 강화한다는 경영 전략에 큰 변화는 없다”며 “앞으로 자산관리, 매매중개, 투자금융 간 균형성장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 과잉반응은 경계해야

독립 IB들의 잇단 붕괴와 피인수, 뒤이은 미국 정부의 대응방식을 두고 국내외 일각에서는 ‘영미식 금융자본주의의 몰락’, ‘신자유주의의 종언’ 등의 해석을 한다. 심지어 ‘자본주의의 붕괴’라는 이념 논란까지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최근 친노 진영의 정치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에 “신자유주의가 금융위기의 원인”이라는 취지의 댓글을 달았다.

이와 관련해 전광우 금융위원장은 22일 “금융시스템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한 건 분명하지만 ‘신자유주의’ 혹은 ‘금융자본주의’의 종말로 해석하는 것은 과도한 측면이 있다”고 반박했다.

방한 중인 프랑스의 석학 기 소르망 파리정치대 교수는 23일 “위기가 확대 해석돼 과잉 규제로 이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규제 전문가인 김종석 한국경제연구원장은 “이번 사태는 시장의 진화를 정부의 감독과 규제가 못 따라가 생긴 일”이라며 “정부 감독자들이 시장에 대한 안목을 더 키워야겠지만 금융자본주의의 실패 등을 논하는 것은 견강부회”라고 지적했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 월가 독립 IB 영욕의 역사

대공황 덕에 뜨고

모기지 위기로 무너져

《‘독립 투자은행(IB) 중 상당수는 1929년 터진 대공황의 책임자를 찾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당시 금융회사들의 탐욕스러운 주식투자가 대공황의 주범으로 지목됐다. 민주당의 카터 글래스 상원의원과 헨리 스티걸 하원의원은 월가의 반대를 이겨내고 상업은행이 증권업을 겸영할 수 없도록 한 ‘글래스-스티걸 법’을 만들어 1933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어 1934년 보스턴은행에서 퍼스트보스턴이, 1935년 모건은행에서 모건스탠리가 각각 분리되는 등 IB들이 속속 설립됐다. 증권업 및 IB업무를 전담하는 회사였다.

IB들은 인수합병(M&A)이 활성화되고 유가증권 인수시장 규모가 급증한 1960∼70년대에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시장실패에 대한 정부 개입을 강조하는 ‘케인스주의’가 풍미하면서 그 여파로 금융규제도 강해졌다. 공화당 출신 리처드 닉슨 대통령마저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라고 말하던 시대였다.

IB들은 규제를 피해 유럽 등으로 진출했다. 특히 마거릿 대처 총리가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펴던 영국이 1986년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한 ‘금융서비스법’을 만든 이후 IB들은 대거 영국 런던의 ‘시티(런던 시내의 금융가)’로 진출했다.

이에 대항해 공화당 출신 로널드 레이건, 조지 부시 대통령은 금융규제 완화에 나섰지만 민주당의 반대로 실패했다. 하지만 1990년대 말 연기금, 뮤추얼펀드 등의 급성장으로 수익률이 급격히 하락한 상업은행들은 투자은행 겸업을 강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1998년 4월 상업은행인 시티코프와 IB 중심인 트래블러스그룹이 합병을 발표한 이듬해 빌 클린턴 대통령은 상업은행의 증권사 겸업을 인정하는 ‘그램-리치-블라일리법’에 서명했다.

이후 미국의 투자은행은 씨티그룹처럼 상업은행이 투자은행을 자회사로 두는 형태와 모건스탠리처럼 증권회사가 전업투자은행으로 발전한 형태로 각각 성장했고 2000년대 들어 파생상품 거래를 통해 높은 수익을 냈다.

고위험·고수익의 파생상품 거래가 이들의 운명을 갈랐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 담보대출) 부실에서 출발한 금융위기로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가 은행지주회사로 업태를 바꾸면서 독립 IB는 일단 월가에서는 사라지게 됐다.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투자은행(IB·Investment bank):

주식이나 채권을 인수, 판매해 기업에 장기 자금을 공급하고 인수합병(M&A) 자문, 기업공개(IPO),파생금융상품 설계, 매매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대형 증권사. 예금, 대출업무는 하지 않는다.

:상업은행(commercial bank):

예금을 받거나 대출을 해 주고 수표나 어음을 발행해 결제 수단을 제공하는 일반적인 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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