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변혁을 꿈꾸다]<10·끝>내부 공간의 평등

  • 입력 2007년 12월 26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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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삼형제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러 차례 이사 끝에 우리 집에 방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안방을 제외하곤 가장 큰 방을 차지했다. 내가 차지한 두 번째 방은 책상도 들어가고 이불을 펴도 넉넉한 크기였다. 막내의 방은 현관 바로 앞에 있었는데 매우 작았다. 막내가 커 가면서 방은 좁아졌고 고등학생이 되고 나선 대각선으로나 겨우 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왜 내가 큰 방을 차지해야 하는지, 왜 막내는 작은 방을 차지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니 내가 장남이었기 때문이 아닌지, 장남이라는 사실이 내게 큰 방이라는 혜택을 준 것이 아닌지, 궁금했다. 집에 있는 방들은 왜 크기와 향(向)이 서로 다른 것일까. 이것은 한 번도 문제되지 않았다. 이제 그 질문을 시작하려 한다.


내부 벽을 헐어낸 아파트의 단면 투시도. 지금의 아파트 내부는 방과 거실 등이 견고한 벽으로 구분되어 있다. 프라이버시에 대한 과도한 믿음에서 벗어나 벽을 헐고 개인 영역(방)과 공동 영역(거실 주방 등)의 경계를 느슨하게 만든 아파트의 모습니다. 벽을 헐어내면 커튼이나 가구로 필요한 공간을 구획할 수 있다. 이 이미지의 가운데 세로로 보이는 것이 커튼이다. 컴퓨터그래픽 최문규 씨·가아건축

○ 기존 아파트의 획일적 평면구조

건축은 사회 구조가 표현되는 구체적 모습이다. 특히 비슷한 평면을 갖는 아파트는 사람들에게 평균적 삶을 요구한다. 아파트의 모양과 디자인 등 외부 모습에 대한 생각은 많고 평면의 새로움과 편리성에 대한 말도 많다.

대형 건설회사들은 매일매일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미해 좀 더 멋진 아파트를 거대 시장에 내놓고 비싼 모델을 써서 광고한다. 아파트 내부의 모든 방은 남향으로 배치하고, 부엌을 새롭게 디자인하고, 최첨단 시스템을 가미하고, 서재는 거실로 들어오고, 심지어 유비쿼터스까지…. 그렇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아파트는 만들어 가는 집이라기보다는 주어진 사용법에 따라 살 수밖에 없는 물건에 머문다.

아파트의 평면은 새롭고 발랄한 아이디어가 넘치긴 하지만 평등하지도 자유롭지도 않은 견고한 구조다. 나의 질문이 시작된 곳도 바로 여기다. 이러한 견고함을 조금은 흩뜨리고 느슨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색다르고 여유로운 삶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동안 우리가 상식이라 믿어 온, 너무나 공통적 아파트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는 없을까. 비록 한정된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찾아볼 수는 없는 것일까.

○ 동일한 크기의 방, 내부 공간의 평등

아파트의 변혁을 꿈꾸는 것은 지금의 아파트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그 대안을 찾는 일이다. 하지만 내부 공간에 대한 질문과 대안 모색은 그동안 경시되어 왔다. 그렇기에 내부 공간의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그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아파트 방들의 크기를 모두 같게 만들면 가족 간에 작은 평등이 시작된다. 이 놀랄 만큼 단순한 변화는 아파트 내부를 같은 크기의 방과 공용 공간으로 구분함으로써 그동안 고착화된 위계를 흔든다. 여기에 각각의 방들이 같은 향을 갖게 되면 그 집은 조금 더 평등해진다. 또 면적은 같고 모양은 서로 다른 아파트 방들은 평등하면서 다양한 삶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변해도 견고히 구획된 방은 그대로 남는다. 각각의 방은 가족 구성원으로 하여금 자기의 공간을 소유하도록 하고 문과 열쇠는 각자의 영역을 굳건히 나눈다. 그 영역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신화화된 개인 공간과 프라이버시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 아파트의 가치, 크기에서 질로 바뀌어야

가족마저도 각각 개인의 공간을 가져야 한다는 믿음은 무너질 수 없는가. 가족의 구조는 빠르게 변한다. 출산율의 감소, 이혼 가정의 증가, 기러기 가족, 그리고 미혼 독립이나 사별에 따른 독신가구까지 새로운 형태가 나타났고 지금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지금의 아파트는 이런 사회 변화를 수용하기보다는 그저 맞춰 살도록 강요하고 있으니 견고한 아파트란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새로운 가족 구조에서 방의 구분이 없는 것만으로도 가족의 관계는 변할 수 있다. 최소한의 프라이버시만 보장되는 집은 더 자유로운 삶을 제공할 수 있다. 벽을 없애고 가구로 벽을 대체할 수 있다. 가구들의 다른 배열만으로도 질서가 변한 새로운 집이 된다.

주방은 집의 중심일 수도 있지만 맞벌이가 증가하는 요즘 주방은, 집을 쉬는 곳이 아니라 일의 연장된 장소로 만들어 버린다. 스위트홈 신화의 발생 장소인 부엌이 없어지면 아파트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인가. 또 좀 더 면적을 넓히기 위해 발코니를 확장하기보다 아파트의 절반을 정원으로 꾸미는 것은 어떨까. 큰 아파트만을 추구하는 이 시대, 크기에서 질로 아파트의 가치가 바뀌지 않겠는가.

비판 없이 반복되는 한국 아파트의 동일성. 이제 그 동일성을 벗어나 서로를 존중하는 차이를 만들기 위해 끝없이 질문해야 한다. 그 질문은 결국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한 아파트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방의 크기와 방향을 같게 만든 아파트 내부의 단면 투시도. 방 모양은 다르지만 면적은 동일하다. 이렇게 방의 크기와 방향을 동일하게 하면 구성원 간의 작은 평등이 이뤄진다. 컴퓨터그래픽 최문규 씨·가아건축

최문규 건축가·연세대 교수

:필자 약력:

△연세대 및 동대학원 건축과 졸업 △미국 컬럼비아대 건축대학원 졸업 △한국건축가협회상 수상(2002년) △미국 건축잡지 PA(Progressive Architecture) 어워드 수상(2003년) △미국 AIA(American Institute of Architects) 어워드 수상(2004, 2005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수상(2005, 2007년) △미국 건축잡지 AR(Architectural Record) 디자인 뱅가드 수상(2007년) △제7회 상파울루 건축 비엔날레 및 제9회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초청 △건축작품 : 쌈지길(서울), 정한숙 기념관(경기) △현재 연세대 건축공학과 교수

※ 본보에 소개된 아파트 설계 아이디어와 이미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필자 명단:

① 서현 (한양대 교수)

② 장윤규 (국민대 교수)

③ 정욱주 (서울대 교수)

④ 황두진 (황두진건축사사무소 대표)

⑤ 장순각 (한양대 교수)

⑥ 김승회 (서울대 교수)

⑦ 김광수 (이화여대 교수)

⑧ 신혜원 (lokaldesign 대표)

⑨ 최욱(스튜디오 ONEOONE 대표)

⑩ 최문규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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