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24시]별을 단 임원님⑤/부하가 상전

  • 입력 2002년 3월 13일 17시 28분


전자회사 A사에 근무하는 최모 상무(48)는 매일 아침 다른 직원보다 20분 정도 먼저 출근한다. 뒤늦게 출근하는 직원들에게 환한 웃음과 함께 아침인사를 건네는 것도 그가 빠뜨리지 않는 주요 일과 중 하나. 사무실 앞에 놓여 있는 신문 다발을 직접 챙기는 것은 물론 가끔씩은 정수기 물통을 손수 교체하기도 한다. 물론 뒤늦게 출근하는 직원들에게선 상사에 대한 미안함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요즘은 대기업 임원이라고 해서 예전처럼 부하직원을 함부로 부리지 못한다. 책상에 발을 올리고 앉아 부하직원이 올려놓는 결재서류의 내용도 잘 모르고 도장만 찍어대던 70∼80년대 임원의 모습은 이제 점점 사라지고 있다.

부하직원에게 찍혔다간 제 명(命)을 다하지 못하고 옷을 벗는다는 공감대도 점차 확산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부하직원 눈치를 살피고 일하기 좋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배려하는 임원이 각광을 받는 시대가 됐다. ‘부하를 깍듯이 모시는 임원이 더 빨리 승진한다’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 임원의 권위는 사라져가고 무거운 책임만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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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부품업체 B사의 박모 이사(46)는 부하직원을 ‘모셔야’ 하는 임원의 비애를 이렇게 압축했다.

“임원의 입지가 날이 갈수록 좁아지는 것은 실적 지상주의에 가장 큰 원인이 있습니다. 연초에 내건 목표를 지켰는지 여부에 따라 임원의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것이죠. 상사라고 강압적으로 지시했다가는 ‘그래 너 혼자 잘해봐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직원들이 늘게 되고 그러다간 임원만 다치게 돼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얼마나 눈치가 빠른지….”

한 섬유업체의 강모 상무(51)도 스스로를 ‘샌드위치 세대’로 평가하며 한숨을 내쉰다. 10년 전에는 상사 눈치보느라 숨도 크게 못 쉬고, 요즘에는 부하 눈치 보느라 쩔쩔매는 것이 요즘 임원들의 처지. 일과 후 불쑥 저녁회식을 제의했다가는 아무도 호응하지 않아 망신만 당할 수도 있다고 그는 말한다.

“말로만 부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직원들의 표정 하나 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진정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직원은 따로 불러 다독거려 주기도 하고 가끔씩은 조퇴를 시켜주기도 합니다. 노래방에 가면 젊은 친구들이 좋아하는 노래 한 곡 정도는 불러야 ‘말이 통할 것 같다’는 평을 듣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조직의 힘을 극대화할 수 없고 좋은 실적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죠.”

박정훈기자 sunshad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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