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법]되돌아본 인권운동 2題

  • 입력 2000년 12월 11일 18시 39분


▼ 인권운동사랑방 대표 서준식씨 ▼

살아있는 한 인간을 평가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평생을 하나의 가치에 헌신했다면 그의 가치를 통해 생을 되짚어 보기는 다소 수월할 수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인권운동가인 ‘인권운동사랑방’ 대표 서준식(52)씨와 ‘인권’이라는 가치는 바로 그런 관계에 있다.

실정법의 잣대로만 본다면 그는 교도소에 세 번이나 다녀온 보안사범이자 지금도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피고인이다. 또 실정법에 따른 보안관찰처분을 고의적으로 어기고 있는 현행범이자 확신범이다.

그러나 그의 오십 평생은 인권 신장을 위해 잘못된 법과 관행에 저항해온 투쟁의 연속이었다. 또 그 투쟁의 ‘과실(果實)’로 얻어진 각종 인권보호 제도는 현시대를 사는 모든 한국인들이 함께 향유하고 있는 것들이 적지 않다.

인권운동가로서의 그가 최초로 맞서 싸운 것은 유신체제가 만들어낸 대표적 악법으로 악명 높았던 ‘사회안전법’. 이 법에 따라 법무부는 행정처분만으로 형기를 마친 공안사범이 전향을 하지 않는 등 ‘재범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 교도소보다 더 열악한 보안감호소에 무기한 수감할 수 있었다.

71년 이른바 ‘모국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돼 징역 7년의 형기를 마친 서씨는 이 법에 따라 보안감호소에 수감돼 10년이라는 형기를 더 복역해야 했다. 가족은 그에게 사상전향을 애원했지만 ‘전향이후의 심적 황폐함’이 두려웠던 그는 87년 청주보안감호소에서 처절한 단식투쟁을 통해 사회안전법 폐지 투쟁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2주일로 예정해 시작한 단식이 51일간 지속됐고 국내 인권단체들이 구명운동에 나서면서 전 세계 인권단체들도 가세했다. 이에 힘입어 그는 88년 5월 전격적으로 석방됐다. 비전향 공안사범이 석방된 것은 그가 처음인 셈. 사회안전법은 결국 이듬해인 89년 초 폐지돼 지금의 보안관찰법으로 대체됐다.

이후 인권운동가로 활동한 그는 97년 ‘인권영화제’에서 ‘레드 헌트’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구속돼 다시 한번 옥고를 치른다.

그러나 당시 재야에서는 그의 구속을 두고 “감옥으로의 출장”이라고 불렀다. 비록 수인(囚人)의 몸이지만 잘못된 교도소의 관행을 지적하고 각종 제도의 개선을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그가 문제삼은 것은 △징벌 재소자의 먹방수용과 계구(戒具)사용 △미결 피고인의 법정 등 외부에서의 수의(囚衣)와 계구 착용 △본인관련 신문기사 삭제 등의 관행.

헌법소원 제기와 형사고소 등으로 이어진 법적 투쟁에 힘입어 98년 새 정부가 들어선 뒤 대부분의 제도가 그의 주장대로 개선됐다.

“인권의 진전은 기다리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처럼 잘못된 법을 어기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후 단순한 실정법이 아닌 인권의 입장에서 사법부가 과감한 판결과 결정을 내림으로써 인권은 고양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1월 24일 1심에서 대부분 무죄를 받은 ‘레드 헌트’사건과 보안관찰처분 위반에 대한 항소심에서 서씨가 남긴 최후진술이다.

그는 최근에도 ‘국가보안법 폐지 국민연대’ 공동대표와 ‘올바른 국가인권기구 실현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아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그는 “인권이 진보운동과 정치운동의 수단이 되는 ‘정치 지향적 인권운동’이 아니라 전문화된 인권운동이 진보운동을 뒷받침하는 ‘진보적 인권운동’에 매진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진보운동에 인권의 감수성을 심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석호기자>kyle@donga.com

▼ 오늘 10주기 맞는 조영래 변호사 ▼

1981년 12월13일. 서울지검에서 검사시보(사법연수원생)를 하던 한 젊은 예비법조인에게 한 트럭 운전기사 사건이 배당됐다. 트럭에 물건을 싣고 팔러 다니다가 사고로 행인을 숨지게 한 것이다. 검찰의 사건처리 관행이나 기준에 비춰 석방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 시보는 선배검사와 부장검사, 차장검사실을 반복해 뛰어다닌 끝에 석방결재를 받아냈다.

그는 그날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한 젊은 인간의 생애와 그 가족들의 생계가 그의 잘못으로만 돌릴 수 없는 ‘재수없는 사고’로 인해 관료적 절차에 따라 아무렇게나 짓밟혀서는 안된다는 것, 또한 관행이나 사무처리상의 편의가 한 인간의 생애보다 우선해서는 안된다는 의무감, 이것이 낯선 검찰청의 여러 방들을 쩔쩔매며 돌아다니게 했다. 그 운전사는 나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었다.”

일기장의 주인공은 훗날의 ‘조영래(趙英來)’였다. 일생을 억울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했던 인권변호사의 전설. “나에게 잘 아는 대학생 친구가 한명이라도 있었으면…”이라는 말을 남기고 분신자살한 전태일을 위해 친구가 되어 그의 평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쓴 사람. 그는 그로부터 꼭 19년이 지난 90년 12월12일 폐암으로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12일은 그의 10주기.

조변호사의 10주기를 맞아 그의 생애와 활동을 되돌아보는 노력과 운동이 새롭다. 그의 동료와 선후배 법조인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존재가 더욱 그립다고 말한다. ‘조영래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은 이날 오후 4시부터 한국언론재단에서 ‘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성과와 의의’라는 주제로 추모 토론회를 연다.

평전 집필도 시작된다. 집필자는 서울대 법대 안경환교수. 조변호사의 ‘전설’을 법조 후학들에게 살아있는 교훈으로 전하겠다는 것이다.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조변호사의 거대한 역할은 그의 일기장에서 엿볼 수 있듯이 지극히 작은 일, 하찮은 이웃에 대한 연민과 헌신에서 출발했다. 연탄공장 주변의 진폐증 환자, 25살에 정년퇴직해야 했던 여자, 분신자살한 젊은 노동자. 그는 이들의 아픔을 함께 하면서 사회와 역사를 바꿔 나갔다.

<이수형기자>sooh@donga.com

▼ 왜 조영래인가? ▼

“지역간 계층간의 균형발전을 추구하고 인권과 복지의 제도를 확충 정비하는 일도 절박하고 중요한 과제라고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사회정의를 세우고 민주적 법질서를 확립함으로써 공권력과 제반 사회적 권위의 도덕성과 신뢰성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조영래 변호사가 천상(天上)의 손님으로 떠나기 전인 90년 여름에 마지막 남긴 말이다. 그가 혼신으로 노력했던 ‘한국의 민주화’이건만 10여년이나 지난 오늘, 나라가 총체적 파탄 상태에 빠진 지금에 오히려 이 말은 더 강한 효력을 발하고 있다.민주화에 사심없이 한 몸 던지고 간 지금에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지식과 능력에서 이 나라 대표적 엘리트였던 그의 이런 애정은 민주화에 대한 무게있고 뚝심있고 통 큰 실천으로 나타났다.

구조적 모순과 폭압적 국가권력에 대해 누구보다 침착하고 냉철하게 대응한 ‘조영래식 실천’은 지식인의 삶의 한 모델을 남겼다.

그는 실력있는 법률가답게 사회의 모순을 사건화하여 재판으로 대응하였다. 서울 망원동 수재사건은 우리 나라에서 집단소송과 공익소송의 효시(嚆矢)가 되었고, 부천서성고문사건, 상봉동진폐증사건, 보도지침사건을 위시한 수많은 시국사건, 여성조기정년제사건 등을 공익소송으로 끌고가 결국 재판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한 것은 민주화에서 법의 힘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그의 이런 실천적 작업은 인권변호사의 진면목을 보여준 것이기도 했고, 그 후 이 나라 인권변호사의 한 전범(典範)이 되기도 했다.

현실 인식에서 보여준 그의 뛰어난 통찰력과 문제 해결의 길을 정확히 찾아내는 혜안은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을 만들기도 했는데,

그가 떠난 자리에 그를 대신할 사람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정열의 삶 속에서 치열하게 살다간 그의 자리에, 살아남은 자들은 너무 비실대거나 흥청거리는 것이 아닌가. 지금 우리가 조영래변호사를 다시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본다.

정 종 섭 (서울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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