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장 ‘무늬만 공모’]<下>어떻게 바꿔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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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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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정권 걸쳐 불신-냉소만… “차라리 임명제 부활” 목소리도


“대통령 지시사항이다. 90여 개의 공모제 활성화 기관을 지정하고 공모제를 법으로 강제해 더욱 활성화하겠다. 정치권에 ‘로비’하다가 발각되면 선임 과정에서 불이익을 줄 것이다.”

현 정부 출범 직후인 2008년 5월 기획재정부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유명무실해졌다는 지적을 받던 공공기관장 공모제를 ‘원칙대로’ 운영하겠다고 선언했다.

배국환 당시 재정부 2차관은 기자간담회에서 “(지금까지) 사전에 공기업 사장이 사실상 내정돼 실질적인 공모제가 안 됐다. (이런 관례를) 근본적으로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낙하산’의 고리를 끊고 유능한 민간 전문가를 뽑아 공공기관들의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정부 발표를 공공기관들은 일제히 환영했다.

4년이 지난 지금, 정부의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으로 전락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모제를 통한 ‘투명인사 확립’을 약속하지만 어느 정부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존 공모제의 틀을 유지하면서 뒤틀린 공공기관의 인사시스템을 바로 세우는 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 “차라리 임명제 부활해야”

정부의 고위 당국자는 “공모제 활성화는 결국 임명권자가 마음을 완전히 비워야 가능한 사안”이라는 말로 현 상황을 요약했다. 임명권자가 ‘내 사람을 쓰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는 한 아무리 완벽한 제도도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이럴 바에는 공모제를 없애고 임명권자가 직접 기관장을 지명하는 임명제로 돌아가자”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낙하산 인사에게 절차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공모제보다 책임 소재가 명확한 임명제가 낫다는 지적이다.

정부의 민주적 정통성이 부족했던 시절에는 ‘낙하산 인사’ 자체를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었지만, 공정한 선거로 나라의 대표가 선출되는 지금은 오히려 임명제가 ‘책임인사의 원칙’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황윤원 중앙대 교수(공공인재학)는 “기관장 인사는 결국 얼마나 훌륭한 자질을 갖춘 사람을 쓰느냐의 문제”라며 “눈 가리고 아웅 할 것 없이 임명제로 전환하면 오히려 임명권자가 인사를 할 때 지금보다 훨씬 조심스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공공기관장 임명제는 이런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프랑스는 한국과 반대로 먼저 공기업 기관장 후보를 정부가 복수로 추천하고, 공기업 이사회가 기관장을 결정하면 정부가 이를 확정한다. 미리 내정된 후보를 정당화하는 공모 과정이 장기간 반복되면서 정부와 공기업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무너지고, ‘공공기관장 인사는 모두 짜고 치는 것’이란 불신과 냉소만 무성해진 한국의 공모 절차와 크게 다른 부분이다.

이재은 충북대 교수(행정학)는 “프랑스의 임명제는 무능한 사람을 정부가 추천할 경우 이사회가 반대할 수 있기 때문에 ‘낙하산 인사’라는 비판이 나오지 않는다”며 “유능한 인사를 올바른 제도를 통해 뽑는다는 신뢰가 사회 전반에 퍼져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 공모제 이어가려면 대대적 개혁 필요

그러나 상당수 전문가들은 기관장을 임명제로 정하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하고 있다. 인사의 책임을 명확히 한다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공모제가 제 기능을 못한다고 해서 폐기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현행 제도를 보완해 능력 있는 인사를 공정한 절차로 선발한다는 본래 취지를 살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현행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공운법)상 기관장 임명 절차는 겉보기엔 합리적이다. 해당 기관 이사회가 임원추천위원회(임추위)를 구성해 공모한 후보를 심사한다. 여기서 뽑힌 복수의 후보자 가운데 1명이 재정부 공공기관운영위원회의 심의·의결과 주무부처 장관 제청을 거쳐 대통령으로부터 임명된다. 하지만 이 합리적 절차 곳곳에 함정이 숨어 있다.

가장 큰 허점은 임추위가 3∼5배로 추천한 인물 중 임명권자는 자질 및 점수와 무관하게 아무나 임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점찍은 후보가 포함되지 않으면 재공모도 가능하다. 홍길표 백석대 교수(경영학)는 “임추위가 후보를 5배수로 뽑는다는 건 사실상 추천 기능을 무력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임추위 회의록을 공개할 의무가 없다는 점도 문제다. 이에 따라 후보자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선에서 선정 과정이 공개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법상 기관장의 자격을 ‘업무에 관한 학식과 경험이 풍부하고 최고경영자의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정한 것도 있으나 마나 한 규정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김병섭 서울대 행정대학원 원장은 “공공기관장의 인사 권한을 행사하는 기관과 별도로 인사제도의 집행을 감시 감독하는 기관을 설립해 공모제가 원칙대로 돌아가는지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영국의 경우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관인 공직임용위원회와 하원의 공직선발위원회가 공공기관 임원 인사에 관한 심사 사항을 공개하는 등 투명성 제고를 위한 일련의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파행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임추위를 본래 취지에 맞게 운영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위평량 경제개혁연대 연구위원은 “회의석상에서 쓴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을 적절히 임추위에 참여시키기만 해도 현행 공모제의 문제를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다”며 “정부와 여야, 학계와 시민단체 등의 생각을 각각 반영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모이도록 임추위 구성 방식을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공공기관장#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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