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작가 림일이 쓰는 김정일 이야기]<1> 현지지도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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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에 눈도장 잘 찍으면 최고 표창
군부대-공장-농장 ‘모심사업’에 사활

20세기에서 완전 멈춰버린, 역사에 뒤떨어진 폐쇄국가 북한에서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현지지도(현장시찰) 중에 갑자기 사망했다.

1994년 7월 당시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 두 번째로 북한의 특별방송에서 나온 김정일 사망 뉴스는 한반도에 예측불허의 긴장이 고조될 수도 있는 중대사변이다.

이제는 역사인물이 된 김정일은 생전에 현지지도를 많이 했다. 최고통치자로서 현지지도를 통해 인민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려는 노력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불행해진 북한 주민들의 궁핍한 삶은 아이러니하다. 결국 그의 현지지도는 그냥 현지지도뿐이었다.

생전에 인민에게 인자한 모습보다는 강한 카리스마를 더 많이 보였던 김정일이 군부대나 공장 농장 등을 시찰할 때 그가 선택해 간 곳은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보좌진이 기획하고 준비한 곳만도 전부가 아니었다.

그 비밀을 해부하면 이렇다. 북한에서는 모든 군부대나 공장, 기업소들이 김정일 방문 유치를 경쟁적으로 벌였다. 인민의 수령인 그가 현장에 와서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면 그 기관과 책임자는 최고의 표창을 받았기 때문이다.

빠른 승진은 기본이고 명절 때마다 고가의 선물을 받음은 물론이요, 각종 정치회의나 행사에서 상당한 특권을 가졌다. 다시 말해 미래가 확실히 보장됐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행정일꾼’인 공장, 농장의 간부들과 인민군 지휘관들이 맡겨진 본업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김정일을 초빙하는 ‘모심사업’에 사활을 걸었다. 경제과업 총화에서 과대 포장한 허위실적이 난무했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집합한 전시성 행사도 만연했다.

이 일을 뒤에서 밀어준 사람이 바로 당비서와 정치위원인 소위 ‘당 일꾼’들. 다른 말로 ‘당 간부’인데 이들은 행정일꾼과 동등한 권한과 자격을 가졌다.

생전에 김정일의 현지지도 유치는 수천 대 일의 경쟁을 보였다. 인민군부대 각 군단에서부터 말단 중대까지 중앙기관은 물론이고 사회의 행정, 교육, 체육, 공업, 농업, 건설 등의 각 부문에서, 전국의 농어촌에서 이런 ‘모심사업’이 치열하게 이뤄졌고 100배수, 10배수로 압축해 최종 장소가 선택됐다.

이를 전담한 기관이 호위총국이다. 남한의 대통령경호실과 같은 호위총국은 조직과 규모가 방대하며 조직원들은 특수훈련을 받은 최정예요원으로 구성돼 있다. 본부 직속 3개의 전투여단이 있으며 이에 소속된 군인들의 사격술과 무술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다. 예하부대인 평양경비사령부, 평양방어사령부 등을 포함한 호위총국의 전체 병력 수는 대략 12만 명 정도다.

특정기관 및 장소가 방문 예정지로 선별되면 그곳의 사람과 시설물까지 최소 한 달 전부터 비밀리에 특별 관리한다. 이유는 단 하나 김정일의 신변 안전을 위해서다.

생전 김정일의 현지지도 경호는 상상을 초월했다. 우선 금속탐지기와 보안대를 거쳐 3시간 전에 행사장소 입장이 완료된 참석자들은 본인 기준으로 직계 4촌 안에 정치범이나 남한 연고자가 없다. 상급기관의 추천을 받아 선택된 이들은 매우 열성적인 충성분자들이다.

다음 행사 장소나 노선을 3겹으로 장막을 치는데 제일 바깥선인 3선은 보안부(남한의 경찰), 2선은 국가보위부(남한의 국가정보원), 1선은 호위총국이 맡았다. 예를 들어 김정일이 평양에서 청진까지 열차로 이동했다면 그 거리 양쪽에 모두 100m 간격으로 3선 경호가 이뤄졌다. 각 지방의 공권력이 총동원됐다.  
■ 탈북작가 림일은?

1968년 평양에서 태어나 사회안전부와 대외경제위원회에서 근무하다 1996년 쿠웨이트에 노동자로 파견돼 일하던 중 탈출해 1997년 한국에 왔다. 대표작 ‘소설 김정일 1,2’ 는 김정일위원장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로 평양의 거리와 건물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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