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98정국]남북관계,경제난에 곳곳서 발목

  • 입력 1998년 1월 11일 21시 20분


남북관계개선은 곧 출범할 새정부의 국정과제중 ‘준비된 대통령’을 표방해 온 김대중(金大中)차기대통령의 역량발휘가 가장 기대되는 분야의 하나로 꼽힌다. 김영삼(金泳三)정권 내내 남북관계가 공전을 거듭했던 만큼 이제 새정부에서는 그간의 지체를 만회할만한 진전이 이뤄지기를 많은 사람들이 바라고 있다. 그러나 김차기대통령이 풀어가야 할 남북관계의 여건은 한국에서 정권교체 외엔 크게 달라진게 없다. 오히려 지난해말부터 갑자기 터져 나온 한국의 경제위기가 남북관계의 실질적 개선을 막는 악재로 작용할 우려도 있다. “남북한과 미국 중국을 중심으로 올해 한반도 정세를 살펴볼 때 변수는 역시 한국측 상황의 유동성이다. 새정부가 경제난 속에서 어떻게 대북정책을 세우고 추진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하다.” 지난해 12월 제네바 4자회담 1차 본회담에 한국측 대표로 참석했던 한 당국자의 말이다. 그는 한국의 경제위기와 정권교체 상황이 남북관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내다봤다. 사실 김차기대통령이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한다고 해도 우리의 내부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우선 김차기대통령이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남북경제협력부터 그렇다. 김차기대통령의 ‘싱크 탱크’역할을 해온 아태평화재단의 한 관계자는 “남북경협은 침체에 빠진 우리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며 “이를 정치와 분리해 활성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건비 상승 등으로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잃은 우리의 사양산업이 북한에 진출할 경우 저임으로 양질의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고 북한은 외화를 벌 수 있으므로 남북한이 모두 이익을 볼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정부가 의욕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국제통화기금(IMF)체제에서 당장의 채산성을 최우선적으로 따질 수밖에 없는 기업의 호응이 낮다면 경협은 상당 기간 위축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일부 대북교역업체들은 최근 극심한 자금난 때문에 달러화 결제를 연기하거나 시설재의 북한반출을 중단하는 등 사업규모를 축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문에 우리 경제가 조속히 정상화 궤도에 오르거나 김차기대통령이 뭔가 획기적인 조치를 내놓지 않는다면 올해 경협의 진전 속도는 기대보다 늦어질 가능성이 있다. 또 기업의 구조조정에 따른 대량 실업사태로 올봄에 대규모 ‘춘투(春鬪)’가 벌어지는 등 우리 사회가 큰 몸살을 앓게 될 경우 남북경협은 한동안 얘기조차 꺼내기 어려운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이같은 상황에서 김차기대통령이 행여 남북관계 개선에 과잉 의욕을 보이거나 이를 조급히 서두른다면 정치적 논란을 야기하게 된다는 점이다.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김차기대통령이 취임후 경제난 극복이 뜻대로 안될 때 이른바 ‘북한카드’를 첫번째 치적으로 내세우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전임 대통령들은 북한문제의 정치적 이용이 장기적으로 남북관계에 해악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앞의 이익을 위해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김영삼대통령도 그랬다. 그는 지난 95년 6월27일 실시된 지방자치선거를 바로 코 앞에 두고 북한과의 비선(秘線)접촉을 통해 북한에 쌀 15만t을 무상지원하기로 전격 결정했다. 이 때는 그해 여름 북한을 휩쓴 대홍수로 북한의 식량난이 국제적인 현안으로 대두하기 전이었다. 어쨌든 김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재추진을 시사하며 “우리 재고분이 부족하면 수입해서라도 북한에 쌀을 주겠다”고 공언하는 가운데 1차 전달분을 실은 ‘씨 아펙스’호는 선거를 이틀 앞둔 25일 서둘러 북한으로 출항했다. 그러나 이 배는 북한측으로부터 태극기를 하강하고 인공기만을 게양할 것을 강요당해 남북관계엔 큰 파문이 일게 됐다. 대북 쌀지원은 이 때문에 초장부터 비틀거리다 쌀수송선인 ‘삼선 비너스호’억류사건 등 잇단 악재가 발생하는 바람에 남북관계를 도리어 악화시켰다는 혹평을 받았다. 물론 김차기대통령은 통일문제에 대해선 전문가적인 식견과 경륜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는 만큼 이같은 악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예상이기는 하다. 오는 5월엔 다시 지방자치선거가 실시된다. 김대중 정부 출범후 처음 실시되는 선거다.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치러지는 이 선거는 새정부에 대한 첫 평가이므로 각 당은 전열을 정비해 또 다시 총력전을 벌여야만 한다. 따라서 경제문제 등 새정부의 모든 정책이 도마 위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햇볕론’에 입각한 김차기대통령의 북한 끌어안기 정책이 과연 적절한지 여부도 당연히 정치권의 논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이같은 정쟁의 파편이 튈 경우 새정부 출범으로 모처럼 국면전환의 호기를 맞은 남북관계는 또 다시 발목이 잡히게 될 우려가 없지 않다. 더 이상 실기하기 전에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 정치권은 이를 국내정치 상황과 분리해 순수히 민족화합과 통일대비의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한기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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