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닉 리포트]승진욕망 ‘내려놓았다’란 말은 상처받지 않으려는 자기방어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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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김병수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늘 이맘때면 ‘인사 칼바람’이 분다. 출세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이 있고 고개를 떨어뜨리는 사람도 있다.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도 있기 마련. 승승장구하는 동기들 틈바구니에서 만년 과장 꼬리표를 떼지 못한 중년 남자는 괴롭기만 하다. 관심 없는 척, 다른 세계의 일을 대하듯이 “난 다 내려놓았다”고 말하지만, 속은 새까맣게 탄다. 조직이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화가 나는 것이다.

지난해 하반기 진료실을 찾은 50대 초반의 남성이 가슴속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는 회사를 위해 정말 열심히 일해 왔고, 그동안의 성취에도 나름 만족한다고 했다.

“내가 지금껏 일하면서 이뤄놓은 것에 대한 믿음,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 이런 것 때문에 일하고 있어요. 그런데 요즘 체력도 떨어지고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아요. 더이상 회사나 후배를 위해 해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차라리 회사가 나를 자르면 속 시원히 털고 나갈 텐데 말이죠.”

올해 초 그 남성이 다시 찾아왔다. 그는 잠이 잘 오지 않는다고 했다. 생활의 변화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최근에 정기 인사가 있었어요. 나는 회사에서 비중이 낮고 신경을 쓰지 않는 곳에 발령이 났어요. 더이상 나를 쓰지 않겠다는 의미나 다름없어요. 지금까지 회사를 위해 충성해 왔는데 내가 이 정도의 존재밖에 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납니다.”

그는 회사가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함부로 대하고 있다고 생각해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돈과 명예’에 대한 욕심은 내려놓았지만, ‘인정과 존중’에 대한 욕망은 내려놓지 못한 것이다. 이 남자가 과연 6개월 전 회사가 잘라주기를 바랐던 사람이 맞을까. 6개월 전 ‘내려놓았다’는 말은 거짓이었을까.

그건 아니다. 그는 분명 진심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욕심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것이다.

불안이나 우울, 두려움의 감정을 무시하는 중년일수록 ‘내려놓았다’는 말의 함정에 쉽게 빠질 수 있다. 자신은 이런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강한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본질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방어벽을 쌓아올리는 것이다.

진짜 내려놓은 사람은 ‘내려놓았다’라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 진정 내려놓는다는 것은 내려놓는다는 마음마저도 내려놓는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욕망을 쉽게 내려놓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하는 방법도 모른다. 차라리 내려놓았다고 하기보다 약한 마음, 상처 받기 쉬운 마음을 가졌다고 인정하는 게 정신건강에 더 좋다.

김병수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정기 인사#정신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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