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층의 자조 섞인 유행어 ‘잉여인간’

  • 입력 2009년 3월 10일 16시 53분


“나는 방구석에 틀어 박혀 밥이나 축내는 잉여인간~!”

최근 20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잉여인간(剩餘人間)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한자 그대로 ‘남는 인간’이라는 뜻으로 취업도 못하고 사회적으로도 특별한 역할을 하지 않고 있는 자신들의 처지를 빗댄 자조 섞인 말이다. 어떤 일에서든 제대로 된 자신의 역할이나 가치를 찾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무능하고 쓸모없음을 공격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일부 누리꾼은 줄여서 ‘잉여’라고도 한다.

잉여인간이라는 용어는 최근 처음 등장한 말은 아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도 등장했고, 이후 미래학자 제레미 러프킨이나 지그문트 바우만 같은 석학들이 다수의 무기력한 대중을 일컫는 말로도 사용했다. 우리 문학사에선 1958년 손창섭의 단편소설 제목으로 등장한다.

최근들어 우리 사회에서 다시 잉여인간이 주목을 받는 것은 경제 불황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 인사이드'나 '웃긴 대학' 등에는 ‘막일도 없어 인터넷 게임으로 소일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글을 비롯해 고등학생들에게 ‘공부 열심히 해서 잉여인간이 되지 말라’는 인생 선배들의 당부 글도 심심찮게 보인다.

잉여인간을 주제로 만들어진 노래도 있다. 최근 개인 블로그에 자주 소개되는 언더 힙합 뮤지션 FANA(화나)의 ‘잉여인간’이 그것이다. 가사를 보면 이 시대 젊은이들의 좌절감을 엿볼 수 있다.

‘방학도 아닌데 오늘도 방안에만 처박힌 내 모습/가치를 잃어가는 내 목숨/내 모든 의지를 다해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나태함의 최고 수준/일 안하고 씻지 않아도 심장만 잘 뛰잖아. 진짜 난 비참한 인간이야/...매일을 해 뜰 때 까지 난 게임을 해/...RPG의 세계로 빠진 뒤엔 가상과 현실의 경계조차도 애매모호/Level Up을 위해 계속 헤매고,또 헤매고, 또 헤매고, 또 헤매고...’

일부 젊은이들은 잉여인간의 상태가 심화되면 ‘잉여킹(剩餘king)’의 경지에 오른다고 한다. 잉여킹은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 시리즈에 나오는 잉어를 닮은 몬스터 잉어킹에서 따온 말이다.

잉어킹은 모습도 잉여인간과 다르지 않다. 포켓 몬스터에 나오는 대다수의 캐릭터들은 한 가지 이상 싸우는 재주를 갖고 있다. 하지만 잉어킹은 힘도 스피드도 없고 단지 팔딱팔딱 뛰기밖에 할 수 없다는 한심한 몬스터다. 잉어 주제에 헤엄도 제대로 못 치기 때문에 빠른 물살을 맞닥뜨리면 그냥 흘러가 버리고 만다. 그러나 희망이 영영 없는 것은 아니다. 고생 끝에 ‘갸라도스(용)’로 진화하면 뇌세포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강력하고 무서운 포켓몬이 되기 때문이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잉여인간은 젊은이들의 암울한 처지를 반영하는 ‘이태백’이나 ‘88만원 세대’ 같은 기존 용어보다는 부정적이거나 자기파멸적인 의미가 덜하다”고 평했다. ‘이태백’이나 ‘88만원’세대가 경제적인 상황을 직접 반영하며 보다 직접적인 공격성을 담고 있는 것에 비하면 그 정도가 덜하다는 설명이다. ‘잉여인간’이 결국 잠재력을 발휘할 경우 ‘잉여킹(갸라도스)’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이야기 되고 있기 때문이다.

곽 교수는 “잉여인간에는 자신에 대한 작은 애정이 담겨 있다”며 “젊은이들이 스스로를 잉여인간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시니컬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의 처지를 우스개로 만들어 쾌감을 얻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현정 동아닷컴 기자 phoebe@donga.com


▲동아닷컴 정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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