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하지현]우울증 떳떳하게 치료하는 사회

  • 입력 2008년 3월 26일 02시 50분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경쟁제일주의 사회지만 반갑지 않은 금메달이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증가율 1위, 2006년 20대 사망원인 1위. 바로 ‘자살’이다.

“요즘 젊은 세대는 온실 속 화초처럼 고생을 안 해서 그런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말자. 88만 원 세대라는 요즘 젊은이들, 살기 팍팍하다. 그리고 자살은 전 연령에서 증가하고 있다. 이같이 어두운 자화상의 가장 큰 원인은 치료받지 않은 우울증이다.

최근 한 발표에 따르면 우울증 환자의 64%는 자기가 우울증에 걸렸는지도 모른 채 살고, 증상이 생긴 후 병원을 찾는 데 평균 3년이나 걸린다고 한다. 먼 길을 돌아온 환자들은 “다른 병인 줄 알았다” “마음의 감기라니까 쉬면 나을 줄 알았다”고 답한다. 더 위험한 것은 우울증으로 치료받는 것이 알려지면 “낙오자로 찍힐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치료를 시작해도 주변에서는 “정신과 약 먹으면 중독돼. 의지로 극복해”라며 돕기는커녕 적극적으로 말린다. 사방에 걸림돌과 장벽뿐이다. 우울함은 짙어가는 데 치료를 받으러 갈 수도 없으니 진퇴양난이다.

이런 분위기에 서광을 비추는 일이 있었다. 인천지법 이우재 판사가 우울증을 앓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는 “우울증은 누구나 걸릴 수 있고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말 자체는 쉽다. 그러나 정신질환을 앓았던 사실을 밝히는 것이 현직 판사로서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못 찾고 헤매는 환자들의 아픔을 공감하기에 큰 용기를 냈으리라.

가수 김장훈은 ‘인간극장’에 출연해 공황장애를 앓았다고 밝히고 치료 받으러 다니는 모습을 공개했다. 이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정신질환을 밝히는 것이 뉴스가 된다니 아이러니다. 마치 동성애자들의 커밍아웃과도 같은 결연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만큼 정신질환을 가진 환자는 자신을 소수자로 느끼며 사회도 그렇게 인식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정신질환은 소수의 문제가 아니다. 보건복지부는 성인 6명 중 1명은 지난 1년 동안 정신질환을 앓은 적이 있다고 발표했다. 더 나아가 3명 중 1명은 평생에 한 번 어떤 종류든 정신질환을 앓는다고 한다. 이래도 운 나쁘고 의지박약인 소수의 문제라고 치부할 것인가? 내 가족 중 한 명이 경험할 문제가 정신질환이다. 그중 가장 흔한 것이 우울증이다. 우울증은 일순간 영혼을 잠식해 우울의 세계에 사람을 가둬서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든다. 그냥 묻어 두고 넘어가 주기를 바라기엔 너무 위험하다.

우리나라 암 수검률은 47.5%. 암 완치율도 41%로 선진국 수준이다. 조기 검진, 조기 치료라는 복지당국과 의료계의 오랜 홍보와 노력 덕분이다. 이 개념을 우울증에도 도입해 보면 어떨까.

평균수명이 80세를 넘기며, 살아가야 할 날은 많아졌다. 그냥 숨만 쉬는 것보다 살아가는 의미를 이해하며 하루를 살더라도 만족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몸뿐 아니라 마음도 건강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울증이 없어야 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0년에 가장 중요한 질환 1위로 우울증을 지목하기도 했다. 정기적으로 암 검진을 하고 적극적 치료를 하듯 마음 안의 골병도 혼자 파스 바르면서 키우지 말고 초기 증상이 있을 때 바로 치료해야 한다. “너 요즘 치료 잘 받고 있니? 많이 밝아졌다”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을 때 우울증은 우리 영혼을 잠식하지 못할 것이다. 더불어 팍팍한 우리 세상도 밝아질 것이라 믿는다.

하지현 건국대 의대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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