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원조 석호필 박사 조선 독감논문 1호를 쓰다

  • 입력 2007년 11월 23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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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 완공된 세브란스병원 건물. 1916년 한국 땅을 처음 밟은 스코필드 박사는 이곳에서 세균학을 가르쳤다. 사진 제공 연세대 의대 동은의학박물관
1904년에 완공된 세브란스병원 건물. 1916년 한국 땅을 처음 밟은 스코필드 박사는 이곳에서 세균학을 가르쳤다. 사진 제공 연세대 의대 동은의학박물관
독감의 계절이 돌아왔다. 해마다 이맘때면 조류인플루엔자(AI)다 뭐다 해서 방역 당국도 긴장의 끈을 바짝 조인다. 일제강점기 조선에도 일찌감치 서양의학을 이용해 독감 연구를 시작한 선각자들이 있었다.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3·1운동 ‘민족대표 34인’에 포함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석호필·1889∼1970·사진) 박사가 바로 주인공이다. 이달 17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 서울대 의대에서 열린 ‘대한의학사학회 창립 60주년 학술대회’에서는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온 조선을 휩쓸던 당시 독감 연구를 이끈 박사의 활약이 처음 소개됐다.

○ 조선인 절반 스페인 독감 걸려

스코필드 박사가 조선에 도착한 직후인 1918년은 전 세계에 스페인 독감이 맹위를 떨치던 시기. 당시 전 세계에서 약 5000만 명이 독감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1918년 봄에 시작된 독감은 1920년을 거쳐 1921년까지 맹위를 떨쳤다. 당시 동아일보 1920년 4월 18일자는 “독감 유행이 일본 각지와 군대에까지 퍼져 3월 말까지 환자가 217만8399명, 사망자가 1만9524명이나 된다”고 전했다.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을 가르치던 스코필드 박사는 당시 조선의 상황을 1919년 미국의학회지와 중국의학회지에 보고했다. 조선총독부 집계에 따르면 독감에 걸려 사망한 조선인은 3만9689명. 이는 인구 1000명당 사망률이 4.3명이었던 일본의 절반도 안 되는 수치다.

그러나 박사는 독감에 걸린 환자가 조선 인구의 25∼50%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했다. 전체 인구 1700만 명 중 400만∼800만 명이 독감에 걸렸다는 얘기다.

이는 총독부 통계와는 달리 1918년 742만 명이 독감에 걸려 13만9128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일부 학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

박사의 논문은 일제의 통계와 달리 훨씬 많은 조선인이 독감으로 사망했을 수 있다는 단서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맞는다면 조선인 1000명당 8.1명이 목숨을 잃은 셈이다.

박사의 행적을 추적한 논문을 발표한 서울대 수의학과 천명선 박사는 “현재로선 일제의 통계가 조작된 것인지 실수인지 알 수 없다”며 “하지만 박사가 미국과 중국 학술지에 투고한 논문은 당시 독감 현황을 담은 거의 유일한 기록”이라고 설명했다.

○ 시험용 백신 자신의 몸에 주사

스코필드 박사의 논문은 연구 상황도 소상히 담고 있다.

1892년 미국의 과학저널 ‘사이언스’는 유행성 독감의 원인이 되는 병원체(균)가 있다는 독일 과학자 리처드 파이퍼의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과학자들은 이 균에 파이퍼 바실루스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문제는 많은 환자에게서 좀처럼 병원체를 분리해낼 수 없었다. 파이퍼균이 독감환자에게 많이 검출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양이 많지 않고 발견되는 확률도 낮았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그보다 더 1차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논란이 일었지만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스코필드 박사도 경성(서울) 지역 환자 7명의 혈액에서 파이퍼균을 분리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박사는 원인을 찾으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실험동물은 물론 자신까지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박사는 환자의 혈액과 객담에서 뽑아낸 성분을 자신의 몸에 주사하기도 했다. 현재 독감의 원인은 균이 아닌 바이러스라고 밝혀져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바이러스의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던 탓에 박사 역시 오류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 스페인 독감 현대 의학 관심 기폭제로

스코필드 박사의 노력은 훗날 한국 의학 발전에 족적을 남겼다. 당시 연구에 참여한 세브란스 의학교 졸업생 신현창 선생과 학생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독감 연구자들로 기록된다. 이들의 연구는 당시 선진국의 과학자에게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환자들을 대상으로 임상시험도 이뤄졌다.

또 스페인 독감은 일제강점기 조선인에게 현대 의학에 관심을 불러일으킨 계기로 작용했다. 매일신문 1918년 11월 20일자는 “미국 위생국 균연구부장 비크 박사가 돌림감기(독감)를 예방하는 종두법을 발견했다.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에게 훌륭하게 효력이 있다”고 소개했다. 요즘으로 따지면 신약 개발을 보도한 과학기사인 셈이다.

박근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un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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