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386도 가라, 40대가 왔다

  • 입력 2002년 12월 3일 15시 08분


인절미 한 보따리, 제주산 토종 흑도야지, 여수돌산 갓김치, 충주 사과 한 광주리…인터넷에서 만난 40대들의 '번개팅'에 찬조물품이 요란하다.

"286, 386은 가라"며 '10대보다 순수하고 20대보다 화끈'함을 주장하는 이들은 동아닷컴 커뮤니티 ‘40대 이상의 사랑방’ 회원들.

이들이 지난 30일 1박2일의 번개모임을 가졌다. 어느 회원이 대전에서 열리는 단축 건강 마라톤에 참가하자는 제의를 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러나 속셈은 교통이 편리한 대전에서 모처럼 전국의 회원들이 한번 만나보자는 것.

모임이 공지되자 참가신청과 함께 찬조물품이 답지하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의 특산물은 물론 듣도 보도 못한 외국식품까지 줄을 이었다. 모임 일정을 맡은 '금주'(닉네임)님은 낭비를 막기위해 모임 열흘전에 접수를 마감해야 했다.

사랑방 번개팅을 위해 각지에서 접수된 찬조물품들. 회원들의 정성을 느낄 수 있다.

모임 당일인 지난 30일, 전국에서 43명의 회원들이 대전으로 모여들었다. 숫자만으로는 많다고 할 수 없지만 서울 대전 광주등, 그야말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였다. 가족을 동반한 회원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의미있는 것은 미국 홍콩 중국등 해외에서도 이 모임 참가를 위해 왔다는 점이다. 게중엔 오직 이 모임만을 위해 입국한 사람도 있다.

10여년째 중국 천진에 살고 있는 '팬더' 김종순씨. 올 들어 네 번째 한국을 방문했다. 매번 ‘사랑방’ 가족들을 만나는 게 유일한 목적이었다. “처음에는 망설였어요. 하지만 ‘사랑방’에 올라있는 글을 읽으면서 점점 중독 되더군요." 이런 그도 처음 오프라인 모임에 참가할때는 몹시 망설였다. "이 사람들에게 정을 줘도 될까" 괜한 불안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 모임에 참가하고 나자 ‘사랑방’에 더 중독됐고, 이제는 모임이 있으면 만사를 제쳐놓고 한걸음에 달려온다.

사랑방 번개모임을 위해 홍콩에서 온 코스모스 김옥순씨, 사이버상에서 늘 만나던 사람들이라 처음 보는 사람들 같지 않다.

22살에 결혼하고 홍콩에서 산지 23년이 지난 ‘코스모스’ 김옥순씨. 그는 한국의 코스모스가 그립던 작년 가을에 ‘사랑방’에 입방 했다. 동아일보 인터넷 뉴스 동아닷컴을 통해 한국의 소식을 접하던 중 ‘사랑방’을 발견했다. 남편이 홍콩사람 이고 아이들도 홍콩에서 태어나 자라서인지 한글을 보는 것만도 반가웠다. “한국에 오랜만에 돌아와보니 너무나 많이 바뀌어서 어리둥절했어요. 좋아진 점도 많지만 어릴 적 한국의 모습이 그립더군요.” 그는 어린시절의 추억과 한국의 정을 '사랑방'에서 다시 찾았다고 한다.

마라톤 대회 전날 밤엔 동학사 아래 민박에서 단합의 시간을 가졌다. 이들 모임에선 조금이라도 나이가 많아 보이면 무조건 ‘언니’, ‘오라버니’다. 비슷한 연배는 닉네임으로 부른다. 회원들 앞엔 각자가 들고 온 찬조 먹거리가 풍성하다.

여수에서 가져온 석화를 구우며 세상 사는 이야기에 꽃을 피운다. 일본에 있는 회원이 보내준 센베이는 중국 천진에서 가져온 술‘진주’의 안주로 안성맞춤이다.

이 날의 최고참자 석천님(45년생)은 직장모임도 마다하고 ‘사랑방’ 번개에 참석했다. 그는 이제껏 많은 모임을 해왔지만 이렇게 정이 가는 사람들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사랑방 회원들 중 마라톤1등을 한 가을님(오른쪽)과 남편 황의창씨. 회원이 아닌 남편이 함께 와서 더욱 즐겁다.

'계리'님의 들꽃기행, 두 딸이 서울로 대학을 가는 바람에 신혼시절로 돌아갔다는 '가을'님 부부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니 밤이 깊아가는 것도 모른다.

덕분에 다음날 마라톤 대회에는 지각을 할뻔했다. 밤새 이야기꽃을 피워 피곤하기도 하련만 마라톤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완주하는 괴력을 과시했다.

시삽 이용표씨는 99년 8월에 이 클럽을 개설했다. 컴퓨터 사용이 익숙하지 않은 40대 이상의 사람들이 여유와 옛 정서를 나눌 공간을 마련하자는 취지였다.

이제 회원들 대부분은 컴퓨터 앞에 앉자 마자 ‘사랑방’에 로그인 하는 것이 습관이 됐다. 어느곳에도 쉽게 끼어들기 어려운 쉰세대 나이에 ‘사랑방’은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도 괜찮은 공간이다. 좋은 글을 남기고 싶은 욕심에 안 읽던 책도 사서 읽게 되고, 영화를 봐도 꼭 글로 남겨두는 버릇이 생겼다.

'사랑방'은 이제 4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생활의 활력을 되찾게 해주는 장소, 특히 그들만의 잔잔한 감동을 나누는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대전=원지혜 동아닷컴기자 wisd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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