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의 그늘(하)]정부 즉흥정책이 망쳤다

  • 입력 2001년 11월 6일 18시 39분


“코스닥요?, 힘깨나 쓰는 사람들은 다 연루돼 있지 않나요?” A투신사에서 코스닥 투자를 담당하는 K팀장은 기자가 취재를 시작하기 무섭게 대뜸 이렇게 반문했다. 투기바람이 지나간 코스닥시장의 뒷편에는 빠른 정보력을 등에 업은 ‘힘있는 소수’가 이득을 봤을 뿐 ‘대박’을 꿈꾸던 개미투자자들에게는 한숨만 남아 있다. 몇 년전 한국사회에 ‘광풍(狂風)’처럼 몰아쳤던 코스닥시장과 벤처 열풍을 일각에서는 ‘정부 주도 천민(賤民) 자본주의’의 대표적 사례로까지 비판한다. 시대적 변화에 맞춰 일정부분 벤처기업 육성의 필요성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도를 지나친 ‘정책실패’에 대한 불신의 골은 그만큼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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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투사 돈만 받으면 ‘너도 나도’ 벤처〓‘2005년까지 벤처기업 4만개,고용인원 120만명, 국내총생산(GDP) 비중 18%…’지난해 1월 산업자원부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보고한 ‘벤처기업의 비전과 발전전략’ 보고서 요지다.

산자부와 정보통신부장관,벤처기업인,관련단체 대표 등 300명이 모여 ‘새천년 벤처인과의 만남’ 행사에서 이런 벤처지원책이 발표됐다. 세계 일류 벤처기업 100개를 키우고 미국 나스닥에 20여개 벤처기업을 상장한다는 장미빛 구상도 나왔다.

1997년 11월 당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후보는 “벤처기업을 육성해 매년 50만명의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대선공약을 내놓았다. 99년 12월에는 중소기업청이 2000년 벤처기업 지원예산에 4조원을 배정했다.

이후에도 벤처지원 정책은 관련 부처끼리 ‘밥그릇’ 다툼까지 벌이면서 속속 나왔다. 코스닥시장이 시들해진 최근에는 벤처투자로 손실을 본 벤처캐피털에 손실을 최저 50%까지 보전해 주는 희한한 아이디어도 나왔다. 당정협의 과정에서 제동이 걸려 아직은 설익은 단계지만 시장에서는 이런 발상을 낸 장본인이 누구인지를 놓고 뒷말이 무성했다.

장인환(張寅煥) KTB자산운용 사장은 “정부가 수시로 내놓는 벤처정책을 들여다보면 마치 과거 유신시대에 ‘새마을 운동’ 하듯 캠페인성으로 하는 것이 허다하다”고 지적했다.

벤처를 마구잡이로 키우려다 보니 코스닥시장에선 ‘사이비 벤처’가 넘쳐흘렀다. 투자자들은 어떤게 ‘콩’이고 어떤게 ‘팥’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코스닥증권 관계자는 “기술에 대한 심사를 하기보다는 창업투자회사(벤처 캐피털)에서 돈만 받으면 무조건 벤처기업으로 인정해 준 것이 큰 잘못이었다”고 꼬집었다.

▽벤처가 재벌(財閥) 대안?〓대통령이 ‘벤처강국’을 강조한 뒤부터 정부 고위당국자들은 “재벌의 대안(代案)은 벤처”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각 부처가 앞다퉈 벤처지원책을 내놓았고 시장논리에 거스르는 무작정 ‘퍼주기 정책’도 지원책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등장한 일들이 적지 않다. 벤처거품이 사라진 지금 벤처가 대기업을 대신해 한국경제의 주력이라는 발상에 고개를 끄덕이는 경제전문가는 거의 없다.

S창투 B사장은 “산업자원부 정보통신부 중소기업청 기술신용보증기금 등 정부부처에서 벤처지원을 경쟁적으로 하다보니 일단 간판을 내걸고 돈만 타가려는 엉터리 벤처기업이 줄을 이었다”며 “옥석을 구분하지도 않고 국민세금을 대 주다가 대형 금융사고의 후유증만 불러일으켰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최근엔 정부가 국민연금 등을 통해 연말까지 5000억원이상의 투자재원을 만들어 1만여개 기업을 지원한다는 대책을 내놨다. 성소미(成素美) 한국개발연구원(KDI) 박사는 “정부는 직접적인 벤처자금 지원 등 양적 성장을 위한 정책보다 벤처 생태계의 질을 높이는데 힘써야한다”고 말했다. 벤처는 그야말로 말그대로 수익이 높은만큼 위험도 큰 ‘벤처’일 뿐이지 나라 전체의 명운을 걸 정도로 무리하게 비중을 둘 산업정책을 펴선 안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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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정신은 뒷전, 재(財)테크에만 치중〓정부가 벤처기업 자금줄인 코스닥시장을 투기장(場)으로 만들어놓았다는 점은 두고두고 정책실패로 남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코스닥시장이 제대로 된 ‘인프라’를 갖추지 못했는데도 정부는 ‘돈놀이성 증시과열’을 ‘시장의 수급원리’에 따른 것이라며 팔짱만 끼기 일쑤였다.

적잖은 벤처기업은 정부의 수수방관 속에 기술개발과 수익 청사진을 만들기보다 겉모양만 꾸미는데 치중했다. 매출과 순이익을 부풀리는가 하면 허위공시를 내 투자자들을 속이고 주식등록 과정에선 대주주와 기관투자가들의 시세차액을 챙기는 등 음성적인 주식거래가 판을 쳤다. 적자를 흑자로 바꾸는가 하면 제3시장에 등록된지 3개월만에 부도를 내고 대주주가 도망을 치는 사례도 생겼다.

‘무늬만 벤처’인 기업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진정한 벤처기업의 생존기반까지 뒤흔들고 있는 것도 큰 문제점. 투기붐이 휩쓸고 간 뒤 맥없이 무너진 시장에선 건실한 벤처기업조차 자금난 때문에 말라 죽어가고 있다.

미국 암벡스그룹 이종문 회장은 “탁자밑에서 이뤄지는 어두운 거래, 프로의식이 부족한 기업가,문제점을 감추려고만 하는 기업문화, 부족한 전문인력 등이 벤처가 오그라드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배재규 삼성투신운용 주식2팀장은 “투기꾼들이 시장에서 불법으로 ‘작전’을 하면 감독당국이 끝까지 추적해 이익을 모두 뺏고 파산시켜야 한다”며 “정부의 허술한 감시망을 틈타 기업가정신으로 차 있어야 할 벤처업계가 일부 세력의 재테크수단으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최영해·김태한기자>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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