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벤처 긴급진단/모랄해저드]하루 술값 1000만원

  • 입력 2000년 10월 23일 18시 50분


“사장이 회사돈을 좀 쓴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됩니까?”

꽤 유명한 벤처기업 A사의 K사장은 요즘 심기가 불편하다고 한다. 사내 직원들의 퇴진 요구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불화의 원인은 과도한 술 접대비. K사장이 거래처 사람들을 만나 한번에 1000만원이 넘는 술값을 여러번 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문제가 됐다. 해외출장 중 비행기 1등석을 이용한 것과 특급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묵은 사실도 거론됐다.

몇몇 벤처기업이 공동투자해 설립한 B사의 L사장은 ‘회사돈을 내 돈’처럼 생각한 케이스. 회사에서 수시로 가지급금을 받아 아파트를 넓히고 유학간 자식의 용돈까지 댔다. 투자사들은 자진사퇴 형식으로 사장을 해임하면서 사태수습에 나섰지만 회사는 주요 인력들의 이탈로 심각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출신의 한 사장은 가족의 결혼 비용 6000만원을 법인카드로 결제하고 집무실에 비밀 홈바까지 만들어 구설수에 올랐다.

벤처업계가 심각한 도덕적 해이(모럴해저드)로 휘청거리고 있다.

한국디지탈라인의 부도에서 보듯 일부 벤처기업인들의 도덕적 해이 현상이 벤처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한창 잘 나갈 때 투자자로부터 받은 돈으로 최고급 승용차를 굴리고 밤마다 주연을 벌이는 데 탕진한 기업들은 자금난이 닥치면서 경영진과 직원, 주주들이 반목하는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다. 최고경영자(CEO)들은 추가 투자금을 받기 위해 여기저기 손을 벌리고 있지만 투자시장의 분위기는 냉랭하기만 하다.

벤처업계의 한 직원은 “연초 받은 스톡옵션이 모두 휴지조각이 돼버렸다”면서 “사장이 매일 밤 고급 술집에서 팁을 뿌려댔다는 얘기를 들으면 내가 왜 이런 기업에 들어왔는지, 서글픈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금융, 연예 등 본래 사업과는 무관한 분야로 사업영역을 넓힌 벤처기업가를 둘러싼 외화도피나 호화생활에 대한 의혹도 꼬리를 문다. 유상증자 지분을 대기업에 양도한 한 인터넷기업 사장의 개인재산이 수천억원대라는 설도 있고, 벤처 1세대로 분류되는 Y사장과 K사장은 각각 로스앤젤레스와 파리에 호화판 별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한국 벤처사업가들은 미국 실리콘밸리 스탠퍼드대학 주변 고급주택가의 부동산 구입에도 열을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기술력 포장과 허위 발표로 투자자들을 속이는 것도 예사로 통한다. 건설 관련 B2B업체인 E사의 C사장은 3월 “회사설립 6개월만에 100억원의 매출을 달성했다”고 언론에 공개했지만 당시 매출은 전무했던 것으로 드러나 주주들이 형사고발을 준비중이다.

벤처컨설팅 전문업체 비즈하이의 한상복 파트너는 “자본금이 수십억원도 되지 않는 벤처기업의 경영진이 접대비로 하룻밤에 1000만원 이상을 허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벤처산업의 위기극복을 위해서는 거품 제거도 필요하지만 업계 전반에 만연한 도덕적 해이 현상부터 근절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태한기자>freewi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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