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실리콘벨리 통신]실리콘벨리는 금녀의 땅인가

  • 입력 2000년 8월 20일 18시 57분


우리 아이들은 물론 나에게도 장난감가게 구경은 특별한 경험이다. 화려한 인형들 틈에 서면 나는 어느새 ’무도회의 늙은 신데렐라’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깐. 말끝마다 ‘남녀평등’을 부르짖는 미국에서, 그것도 장난감 가게에서 나는 남녀칠세부동석의 단초를 발견하고 만다. 장난감들이 거의 다 남녀용으로 구분돼 있는 것이다. 가게에는 남자 아이들을 위한 호전적이고 ’과학적’인 것들과 여자 아이들을 위한 낭만적인 장난감들이 따로 진열돼 있다. 시험용 게임기에 매달려 있는 것도 온통 남자애들 뿐이다.

수년 전 미국에서는 여학생들이 남학생들보다 수학과 과학 점수가 뒤떨어지는 이유에 대한 연구발표가 있었다. 결론은 남녀의 생리적 구조적 차이가 아닌 환경과 사회화 과정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것. 여성을 종속적으로 만드는 건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화 과정에서의 고정관념 때문이라는 얘기다.

이에 여성운동가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전통적인 교육체제에 의문을 제기하고 심지어 여성의 성적 매력만을 강조한 인형의 퇴출 운동에까지 나섰다. 비난의 화살을 집중적으로 맞은 건 잘록한 허리로 유명한 ‘바비’ 인형. 잘록한 허리와 풍만한 가슴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아이들의 정서와 미적 가치관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이유에서였다.

실리콘밸리 역시 아직까지는 남자들의 세상이다. 전체 노동인구의 44%가 여자이지만 실리콘밸리 57개 대기업 가운데 단지 29%의 기업에만 여성 이사가 있다고 한다.

또 실리콘밸리 200대 기업 중 고위 관리직의 96%가 남성이란다. 이곳에서 10년을 산 내가 몇다리를 걸쳐서 아는 사람 중에도 벤처기업 여성 고위임원이 없는 형편이다.

미 여대생연합회의 조사에 따르면 여학생들도 컴퓨터관련 직업을 충분히 수행할 능력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학생이 이런 직업을 반사회적이고 고립적인 ’남자’ 공부벌레들에게만 적합한 것으로 보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미국 전체를 통틀어 컴퓨터 공학 학부전공자의 28%, 엔지니어링 전공자의 단지 9%만이 여학생이다. 이런, 컴퓨터마저도 남녀를 달리 보는 눈이 있는 걸까?

이윤선 <재미교포>eyoon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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