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각하(閣下)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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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정부출연연구기관의 한 센터장이 ‘천황 폐하 만세’를 외쳤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1년 전쯤엔 여당 원내대표가 ‘대통령 각하’라 불러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각하(閣下).’ 사전 속 의미는 ‘특정한 고급관료에 대한 경칭’이지만 많은 이들은 대통령을 가리키는 말로 받아들인다. 마치 임금의 아버지인 일반명사 대원군(大院君)을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조선시대 신분에 따른 호칭은 ‘폐하(황제·황후)-전하(왕)-저하(왕세자)-합하(정일품·대원군)-각하(정승) 순이다. 각하는 정일품 벼슬아치보다 낮다. 그런데도 고위공직자 등의 입에서 군사독재시대의 유물인 ‘각하’가 튀어나온다. 자유당 시절과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각하=대통령’이란 인식이 굳어졌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때문에 총리, 장관 등 고위공직자를 각하로 부르던 문화는 사라졌다. 대통령에 대한 호칭은 ‘대통령(님)’이 됐다.

‘영부인(令夫人)’ ‘영식(令息)’ ‘영애(令愛)’도 ‘각하’처럼 쓰임새가 좁아졌다. 본래 영부인은 남의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지금은 초청장에서나 볼 수 있지만 ‘동영부인(同令夫人)’이란 표현이 원래의 뜻을 잘 담고 있다. 이는 ‘존경하는 부인과 함께’라는 뜻으로 부인도 함께 초청한다는 뜻이다. 요즘은 언론에서도 대통령 부인이나 다른 나라 국가 원수의 부인을 영부인이라 부른다.

영식과 영애도 마찬가지. 윗사람의 아들과 딸을 높여 부르는 말이었는데 대통령의 아들딸을 지칭하는 낱말로 굳어졌다. 영부인, 영식, 영애의 ‘영(令)’자를 대통령의 ‘영(領)’자로 인식했는지도 모르겠다. 언중은 남의 아들이나 딸은 ‘아드님’ ‘따님’으로 부른다.

마누라 자랑은 팔불출에 속한다 했던가. 자기 부인을 높여 부른다는 생각에, 약간은 장난기를 섞어 ‘어부인(御夫人)’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우리 사전엔 ‘어부인’은 없다. ‘어(御)’는 임금과 관련된 낱말에 붙는다. 임금의 명령을 어명(御命), 임금의 나이를 어수(御壽),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술을 어주(御酒)라 하듯이.

폐하, 전하, 저하, 합하, 각하…. 왕후장상의 핏줄은 따로 있고, 민초는 고귀한 분의 소유물로 여겨질 때나 쓰던 말이다. 지금은 반대다. 국민이 주인인 시대다.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천황 폐하 만세#각하#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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