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하 전문기자의 그림엽서]감당해야 할 위험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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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발매된 길버트 캐플런 지휘의 말러 교향곡 2번 음반(도이체그라모폰 레이블) 표지. 동아일보DB.
2003년 발매된 길버트 캐플런 지휘의 말러 교향곡 2번 음반(도이체그라모폰 레이블) 표지. 동아일보DB.
조성하 전문기자
조성하 전문기자
올 첫날 아침. 미국 뉴욕타임스와 영국 텔레그래프 등 유수 일간지의 인터넷판에 다소 긴 추도 기사가 떴다. 이날 뉴욕 맨해튼에서 세상을 뜬 미국인 길버트 캐플런(1941∼2016)의 75년 생애를 조명하는 글이었다. 음악 애호가라면 누구든 기억할 이 사람. 그는 언론인이자 지휘자였고 지휘자로는 특이하게 평생 단 한 곡,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2번만 돈도 받지 않고 100여 차례 연주했다. 한국에는 2010년 성남아트센터 개관기념 공연에 초대를 받고 와 KBS교향악단을 지휘했다.

뒤늦게 그를 추모하는 이유. 그가 보여준 ‘이중생활’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답인 듯해서다. 이중생활이란 텔레그래프의 추도 기사에 잘 드러나 있다. ‘말러 연구의 저명한 학자로 변신한 월가의 백만장자 출신 아마추어 지휘자’라는. ‘저명한 학자’ ‘백만장자’ ‘아마추어 지휘자’라는 수식어는 모두 한 사람을 수식한다. 캐플런은 명문 듀크대를 졸업한 후 월가로 진출한다. 1967년 ‘인스티튜셔널 인베스트’라는 투자 잡지를 창간하고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승승장구한다. 그리고 1984년 이 잡지를 7500만 달러에 팔아 백만장자 반열에 들었다.

그런 그가 지휘자로서 돈도 받지 않고 오로지 한 곡만 지휘하며 말러 전문학자로 추앙받게 된 연유. 24세 때인 1965년 뉴욕에서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한 아메리칸심포니의 말러 교향곡 2번 연주를 들은 게 계기다. 그날의 느낌을 그는 생전 AP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번개를 맞은 듯했다. 그래서 연주회장을 나설 때 나는 들어설 때의 내가 아니었다.” 5악장으로 구성된 이 곡은 스케일이 엄청나다. 100명도 넘는 오케스트라에 합창단과 솔로까지 필요하고 연주도 한 시간 반이나 걸린다. 작품엔 ‘부활’이란 부제가 붙었는데, 이 곡엔 인간의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이 두루 담겨 있다.

한꺼번에 두 가지를 하기란 버겁다. 둘 다 소홀하기 십상이어서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김찬삼 박사(2003년 작고)는 평생을 여행과 지리학에 헌신한 외골수. 그건 아프리카 여행 도중 찾아간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로부터 얻은 가르침에서 연유했다. 슈바이처 박사는 ‘한 우물을 파라. 그것도 물이 나올 때까지’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정작 슈바이처 박사는 그렇지 않았다. 의사면서 철학자였고 개신교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에 음악가였다. 캐플런도 비슷했다.

그날 말러 2번 교향곡은 캐플런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그리고 거기 심취된 그는 그 곡의 심연까지 내려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관련된 것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16년. 그러는 동안 지휘를 생각하게 됐다. 그래야 완벽한 이해에 도달할 것 같아서. 1981년 그는 줄리아드 음악원을 갓 졸업한 학생을 사사하며 그 꿈에 도전했다. 그때가 마흔. 지휘자로는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꿈은 이듬해 현실이 됐다. 링컨센터 공연장을 가득 메운 2800명의 초대 손님 앞에서 지휘한 것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평은 예상 밖으로 좋았다. 그래서 지휘는 계속됐다. 런던심포니, 빈 필 등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이 그를 초청했다. 도이체 그라모폰 레이블과는 두 차례 녹음했고 음반도 꽤 팔렸다. 말러 2번 교향곡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수준에 올랐다. 하지만 지휘자가 될 결심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감당해야 할 위험이 너무 커서였다. 하나는 지휘자가 되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휘자를 포기한 뒤 틀림없이 하게 될 후회. 그는 첫 번째 위험을 선택했다.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평생 후회하며 사는 위험은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은퇴 즈음의 중년이라면 누구나 이런 꿈을 꾼다. 은퇴하면 그간 못했던 여행을 실컷 하겠다는. 하지만 실제는 언감생심이다. 가장 큰 이유는 돈. 일하며 돈을 벌던 기간보다도 더 긴 세월을 수입 없이 살아야 하는 게 현실이니…. 그렇다 해도 결단은 할 만하다. 캐플런처럼 ‘감당해야 할 위험’의 잣대로 재보면. 여행을 즐기면 경제적으로 그만큼 어려워진다. 그런데 여행을 포기하면 죽는 날까지 그걸 후회하며 살아야 한다. 답은 자명하다. 후회는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으므로. 캐플런은 죽어서도 말한다. 후회 없는 삶, 그게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
#길버트 캐플런#말러 교향곡 2번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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