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지금은 12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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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지로 흩어진 네 자매가 해마다 시골에 사는 둘째의 집에 모여 사흘간 먹고 자며 김장을 하는데 올해는 배추 오백 포기를 절였다. 12월 첫 주말 시골집 너른 마당에서 일손을 보태주려고 건너온 동네 사람들까지 열댓 명이 둘러앉아 배추에 소를 넣는 장면은 마치 ‘응답하라 1965’를 보는 듯했다.

자매들은 이렇게 담근 김치를 각각 분가한 자녀들에게도 보내줌으로써 겨우내 온 집안 식구 수십 명이 같은 맛을 즐기게 한다. 엄마의 손맛을 기억하는 네 딸들이 모여 그 맛을 공유하며 또한 자녀들에게 그 맛을 대물림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 며느리, 조카들에게 보낼 김치 택배를 포장하던 시골집의 주인은 “바쁜 도시생활에 일없이 시골에 놀러와 사나흘씩 묵으라면 그게 쉽겠어요? 김장을 담근다는 핑계가 있으니 네 자매가 모두 모여지지요”라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자리는 김장을 넘어서 함께 나이 먹어가는 자매들의 정겨운 송년잔치 같았다.

요즘은 도처에서 먹는 이야기들이다. 방송사마다 앞다투어 요리 프로그램을 내보내 무려 20개에 이른다는 ‘먹방’. 방송만 틀면 ‘대한민국은 요리 중’이다. 전 국민의 인사말이 “진지 잡수셨습니까?”였던 배고픈 시절도 아니고 먹고살 만해진 지금 새삼스럽게 ‘먹는 귀신’이 씌었나 싶다. 그렇지만 먹방이 유행인 것은 오히려 먹을 게 넘쳐서일 것이다. 음식이 귀하던 시대에는 찬밥 더운밥 가릴 여유가 없었지만 이젠 더운밥만, 그것도 기왕이면 폼 나게 먹겠다는 뜻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배고파 죽기보다 배불러 죽게 생긴 이 시대에 먹방을 계기로 한 끼의 밥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좋겠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인 ‘식구’는 한 집에서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을 말한다. 밥을 같이 먹는 것, 음식을 나누는 것은 먹는다는 의미 그 이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들은 항상 “밥 먹었니? 밥 먹고 가라”를 주문처럼 되풀이하셨던 것 같다. 밥은 곧 사랑이므로.

배추 오백 포기가 여러 사람의 능숙한 손놀림으로 순식간에 먹음직스러운 김치가 되는 마술을 지켜보면서 음식은 나눌 때 가장 맛있고, 먹는 즐거움도 크지만 먹이는 기쁨도 그에 못지않다는 것, 그리고 열 사람이 한 숟가락씩 보태면 한 사람의 배고픔을 덜 수 있는 십시일반(十匙一飯)에 대해서 생각했다. 지금은 마침 자선의 달 12월이다.

윤세영 수필가
#먹방#쿡방#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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