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이 만난 사람/고미석]“기초과학 박사들, 국민에게 받은 만큼 갚았는지 돌아보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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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종천 정혜서숙 이사장

충남 예산에 정혜과학아카데미를 설립한 우종천 서울대 명예교수는 “굳이 과학이 아니라도 망치질이든 가마솥에 불 때기든 학생들이 손으로 하는 일에 도전할 기회를 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손으로 하는 과학’과 함께 로봇설계와 조립을 통해 더 넓은 과학의 세계와 접하는 융합교육을 개척하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충남 예산에 정혜과학아카데미를 설립한 우종천 서울대 명예교수는 “굳이 과학이 아니라도 망치질이든 가마솥에 불 때기든 학생들이 손으로 하는 일에 도전할 기회를 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손으로 하는 과학’과 함께 로봇설계와 조립을 통해 더 넓은 과학의 세계와 접하는 융합교육을 개척하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1시간 40분을 달려 도착한 충남 예산군의 시골 폐교. 잔디 운동장 너머로 파란 지붕과 샛노란색 벽의 2층 건물이 그림책에서 튀어나온 듯 산뜻하다. 이곳은 우종천 서울대 물리학부 명예교수(73)가 2010년 설립한 과학체험캠프인 정혜과학아카데미(www.funsci.org)의 보금자리다. 국내 나노 반도체 연구와 과학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그는 은퇴하자마자 사재를 털어 고향 근처 폐교에 초중고교생에게 과학의 재미를 일깨우는 실험교실을 꾸몄다. 다음 달 5주년을 맞는 과학아카데미는 보통 주말과 방학을 이용해 캠프를 여는데 행사가 없어도 매주 서너 번 출퇴근한다. 4일 오전 그의 출근길에 동행했다. 》

―체험과 실험 위주의 과학교실을 만들었다던데….


“실험은 과학의 근본이자 뼈대인데 학교에서 실험이 설자리를 잃어간다. ‘빅뱅이론’ ‘초끈이론’도 많은 이가 과학이라고 생각하지만 실험적 입증이 없어 아직 가설에 불과하다. 어른들은 체험학습을 밭에서 감자 캐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과학의 창의성도 체험에서 나온다. 우리의 목표는 직접 보고 만지며 즐기는 ‘손으로 하는 과학(Hands-on-science)의 중요성을 일깨우자는 거다.”

가르치지 말고 깨닫게 하라

그는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이 1950년 브라질에 교환교수로 갔을 때 남긴 말을 들려주었다. “브라질에서는 과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교과서는 암기와 용어의 나열만 있을 뿐이다. 실험에 대한 것은 없다.” 한데 한국의 현실은 여전히 ‘과학=암기교육’에 머물러 있다. 해법을 찾은 끝에 아이들이 로봇을 직접 설계 조립해 과학의 기본원리를 깨닫는 로봇을 활용한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matics)교육을 도입했다.

“순수과학 실험만 시키니까 왜 이걸 배워야 하냐고 묻더라. 그래서 로봇을 통한 융합교육을 시작했다. 2007년부터 미국은 교육개혁사업으로 로봇 스템에 총력을 쏟고 있다. 학생들에게 손으로 하는 과학, 로봇을 통해 과학 수학 컴퓨터를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길을 열어주고 싶다.”

서울대, KAIST 등에 재학 중인 대학생과 대학원생이 체험캠프 멘토로 참여한다. 우 교수는 멘토에게 ‘절대 가르치지 마라’라고 강조한다. 답을 주입식으로 일러주는 ‘가르침’ 대신 아이 스스로 터득하는 ‘깨달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로봇을 만들면서 실패와 성공을 바로 알 수 있다. “실험은 실패를 거쳐 성공한다. 로봇실험에서 시행착오를 겪고 개선책을 찾는 것, 실패해도 다시 도전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게 중요하다.”

그의 교육철학은 ‘지식을 사냥하는 법을 터득하게 한다’는 것. 2001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팀 헌트가 방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과 통하는 게 있다. “노벨상은 질문을 정해 놓고 좇아가는 게 아니라 이런 질문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것을 발견할 때 따라온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노벨상으로 옮겨갔다.

―일본은 의학 과학분야에서 21명의 수상자를 냈고 중국도 올해 상을 받았다. 노벨상 시즌마다 한국 사회는 열패감에 빠진다. 노벨과학상,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

“이번에 노벨상을 누가 받았는지 난 모른다. 아예 쳐다보지 않는다. 내가 받을 것도 아니고(웃음). 노벨상은 시스템과 협력이 만드는 거다. 작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일본의 사례가 그랬다. 수상자 3명 중 지방대 출신 나카무라 슈지가 가장 주목받았으나 실은 공동수상자인 아카사키 이사무 나고야대 교수, 나카무라가 일했던 시골 회사의 산학협력이 일군 성과다. 히로시마에서도 떨어진 섬에 자리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오가와 노부오 회장은 형광등을 대체할 반도체를 꿈꾸며 20년간 연구개발에 번 돈의 20%를 투자했다. 그가 이런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30년간 조명도 못 받는 연구에 매달린 아카사키 교수 덕이다. 일본 정부는 논문도 안 나오는 아카사키 교수에게 계속 연구비를 대줬고.”

노벨상은 교수-기업-정부 합작품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얘기가 노벨상에도 통하는 걸까. 일본의 경우 숱한 실패에도 한 주제를 파고든 교수, 멀리 내다보는 기업, 과학자를 믿어준 정부가 힘을 합친 삼각동맹의 결실이다. 연구의 질보다 논문 수 늘리기에 급급한 교수, 단기성과에 집착하는 기업, 과학계를 불신해 연구비 한 푼까지 시시콜콜 간섭하는 정부는 우리의 현주소다. 이런 동상이몽으로 노벨상은 어림없다는 결론이다.

의제 설정부터 달라질 필요가 있다. “1980년대 중반 일본에서 국가주도 과학기술 개발과제를 정하는 과정에 옵서버 형식으로 참여했다. 한국의 산업통상자원부 같은 곳에서 10년 후엔 뭘 할 건가, 20년 후 어떤 것이 필요할지 ‘사냥감’에 대한 아이디어를 널리 공모한다. 아이디어가 추려지면 과장 이하 관리들이 반드시 참여해 ‘말도 안 된다’ ‘해볼 만하다’는 의견서를 내야 한다. 공모부터 ‘사냥감’의 설계도를 그려 연구의 역할을 분담하기까지 3년 정도 걸린다. 이른바 창조기술의 프로젝트다. 국가의 중요한 과제는 한 사람이나 한 연구실로는 안 된다. 다양한 집단이 힘을 합치고 경쟁도 필요하다.”

―기초과학 연구개발 전략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 문제는 얘기 안 하면 안되나? (잠시 침묵) 정부에서 주는 돈, 연구비, 이런 거는 언젠가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결과물로 나와야 되는 거다. 그 시한이 10년이 될 수도 있고, 20년, 100년 후가 될 수도 있지만. 국민에게 받은 만큼 갚아야 하는 거다. 기초과학도 그런 결과가 나올 자신이 있으면 하는 거다. 그건 제안한 사람이 제일 잘 안다. 기초과학만 하는 박사들과 연구소들은 스스로 사회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논문이 과학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국가브랜드 가치를 얼마나 높였는지 성찰이 요구된다. 내 연구는 사회의 우선순위에 합당한지, 학자들 입장에서 그런 것도 생각하고 연구해야 한다.”

직진코스로는 창조 못 나와

아카사키 교수가 연구를 일찌감치 기업과 공유한 덕에 상용화로 연결된 것처럼 시장과 산업에 대한 과학계의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학자는 지식을 전달해 주는 것에 대해 욕심을 내선 안 된다. 지식을 개발하고 그것을 널리 펼쳐서 인류에 공헌하면 그게 과학자로서 보람을 다하는 거다.”

―과학강국으로 가는 길에서 정부의 역할은….

“참 어려운 얘기다. 정보기술(IT) 강국 기반을 다졌던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과학자문을 맡은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했더니 이런 말로 답했다. 원래 자기 사무실은 아래층이었는데 클린턴이 ‘같은 층에 올려 보내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은 지나가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사무실에 들어와 ‘뭐 해줄 거 없느냐’고 물었다. 막상 대답을 하려고 하면 ‘당신 마음대로 해라. 필요하면 고어에게 말하고.’ 그걸로 끝이었다. 그래서 자기도 아랫사람에게 그렇게 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도와주겠다.’ ‘당신이 제일 잘 아니까 마음대로 하라.’ 그렇게 하니까 일이 잘 풀리더라. 정해준 직진코스로 가면 세상에 없던 창조물이 나올 리 있나. 땅을 파든, 하늘로 날아가든 과학자가 책임지고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밀어줘야 한다.”

우 교수에 따르면 국민이 잘 먹고 잘사는 것, 산업동력을 발견하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 과제다. “1970년대 이후 산업동력이 과학기술이었기에 지금도 거기에 집착하는 거다. 그러나 산업동력을 어디서 찾을지는 좀 다른 차원이다. 산업동력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과학기술인 건 맞지만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중국이나 인도의 추격을 생각하면 대기업 대자본에 기반을 둔 과학기술 경쟁은 한국에 불리할 수 있다. 과학기술의 한류는 작은 규모의 유연성, 신속성을 살려 우리 고유의 산업체계를 만들어야 가능하다. 과학기술과 의료, 교육처럼 혁신에 바탕을 둔 복합산업, 맞춤산업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등 과학교육 ‘칸막이’에 막혔다

인터뷰 도중 그는 교과서 얘기를 꺼냈다. 한국사 아닌 국정 과학 교과서 문제였다. 초등학교 4∼6학년 교과서를 분석하니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등 4토막으로 구성돼 있었다. 교육 수요자를 바라보지 않고 집필진이 학문의 칸막이를 고집해 자기 분야를 방어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고 했다. 시장을 봐야지 내 상품만 좋다고 우기는 꼴이다.

“학문의 교류 없이 자기 분야만 철통같이 지키는 ‘사일로(원통형 곡식 창고) 이펙트’에서 벗어나야 한다. 가령, 산에서 길을 잃으면 어떤 물을 먹어야 하고, 감염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말 필요한 과학지식을 어린 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칠지를 고민해야 한다. 과학 교과서와 교육 문제, 지금 한 번쯤 돌아봐야 한다.”

과학자 스스로 사회에 필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는 물리학계 원로. 공허한 훈수 대신 학생들과 어울리며 과학교육의 해법을 모색하는 교육계 현역. 달변은 아니라도 그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다.

○ 우종천 이사장은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후 미국 플로리다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교수생활을 하다 1974년 모교의 부름을 받고 귀국했다. 전공분야는 자기공명. 레이저 분광을 거쳐 나노로 옮겨갔다. 그는 “학문 발전에 따라 연구도 진화한다. 50년 전 옷을 그대로 입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재단 정혜서숙은 정년퇴임 후 자신의 아호(정산)와 캠퍼스 커플로 만난 아내 최혜미 서울대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그는 “돈도 집사람과 반씩 냈다. 자식이 없으니 죽으면 다 재단에 놓고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정혜서숙은 해마다 충남 예산 아산 천안의 지역 과학꿈나무 중학생 40∼50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한다. 과학아카데미는 재단 부설 평생교육원으로 어린 학생과 노인이 공유하고 즐기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부부의 꿈이다. 내년부터 노년층을 위한 영양 강습, 맞춤형 조리실습 과정을 신설할 계획이다.

사회에 베풀면서 욕심 없이 사는 모습은 집안 내력인 듯하다. 어머니 최덕경 씨는 고려대 의대 전신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1회 졸업생으로 평생 저축한 돈 10억 원을 재작년 모교에 기부한 뒤 타계했다. 인터뷰가 끝나자 최혜미 교수가 작은 꾸러미를 내밀었다. 그날 학교 텃밭에서 갓 뽑은 알타리무(총각무)로 담근 김치였다.

대표집필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고미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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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과학#정혜서숙#과학교육#우종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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