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제2의 정태수’ 성완종發 정치권 쓰나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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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준 정치인 33명 자백해 정계의 인적쇄신 몰고 온 한보 정태수 회장 사건의 복사판
MB 정부 겨냥한 기획사정이 박근혜 정부 ‘자해사정’으로 풍향 바뀌다
김진태 검찰총장 30년 특수통 검사의 직을 걸고 성완종 메모의 진실 밝혀야

황호택 논설주간
황호택 논설주간
노무현 정부의 차떼기 대선자금 수사는 대선캠프의 돈 관리 행태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박근혜 대통령은 과거 대선후보와 달리 직접 돈을 만지지 않았다. 승리한 쪽이나 패배한 쪽이나 대선자금은 불문에 부치던 관행이 무너져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치명적인 부담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 대통령과 박 대통령은 궂은일을 핵심 측근들에게 떠넘겼다. 캠프 사람들은 대선후보를 보호하기 위해 자세한 내용을 보고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큰 덩어리’는 대선후보들도 암묵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이 전 대통령은 주로 이상득(SD) 전 의원이 대선자금 출납을 했다는 것이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정두언 의원은 신동아 3월호 인터뷰에서 “그 당시에 캠프에 있는 사람들은 다 SD한테 돈을 받으러 갔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도 두 번의 경선과 대선을 치르면서 돈을 모으고 나눠주는 역할을 친박 핵심들이 맡았음이 고(故)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의 메모에 나와 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같이 성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잡아뗀다.

이번 사건은 시신이 없는 살인 사건과 같다. 성완종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이 수사를 받기 위해 검찰청에 드나들 때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소리만 요란하다가 심증(心證)은 있지만 정작 물증(物證) 인증(人證)이 부족해 기소가 어렵거나 재판에서 무죄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이 같은 증거법리를 잘 알기 때문에 성 회장의 메모에 금액이 똑떨어지게 적힌 사람들도 일단 잡아떼는 것 같다.

사법절차와는 별도로 이번 사건은 1997년 ‘제2의 정태수 사건’처럼 정치권의 인적쇄신을 몰고 올 가능성이 크다. 한보그룹 회장 정태수 씨가 검찰에서 돈을 주었다고 자백한 정치인이 무려 33명에 달했다. 정 회장은 정치를 하지는 않았지만, 성 회장은 정치와 기업을 겸영했으니 돈 준 숫자가 몇 배 더 많을 것이다. 독학에 자수성가한 기업인들은 시장 바닥의 텃세를 이겨내고 하급관리의 권세와 결탁해 사업을 키웠다. 그래서 돈만 넙죽 받아먹고 정작 어려울 때 ‘생까는’(안면 바꾸고 외면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강하다. 성 회장이 어딘가에 상세한 비밀장부를 남겨놓았을 수도 있다. 태풍에 꼭지가 부실한 사과가 떨어지듯 성완종발(發) 쓰나미는 바닷가의 쓰레기를 휩쓸고 가버릴 것이다.

‘불사조’ 홍준표 경남지사도 정치적으로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성 회장이 돈을 주었다면 홍 지사가 당 대표가 될 경우에 대비해 공천을 부탁하기 위한 뜻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성 회장은 죽었지만 전달책이 검찰에서 진실을 밝히겠다고 하니 ‘모래시계 정치인’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이다.

성 회장이 친박(친박근혜) 실세들에게 준 돈은 “정권 잡으면 잘 봐 달라”는 보험금이다. 그는 절박한 상황에서 정권 실세들을 만나고 전화로 SOS를 쳤다. 그러나 구난(救難)의 동아줄은 내려오지 않고 영장실질심사의 날이 밝아오자 ‘성완종 리스트’ 메모를 윗옷 주머니에 넣고 북한산에 오르며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확인사살 같은 녹음 인터뷰를 했다.

박근혜 정부는 친인척과 측근 비리가 없다는 것을 최대 강점으로 자부하며 이번에 ‘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친이(친이명박)도 견제하면서 공무원의 기강도 잡고 국정의 동력을 회복하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나 전 정권을 향해 쏘았던 미사일이 부메랑으로 날아와 아군 진영 한복판에서 폭발했다.

‘깨끗한 정부’ ‘깨끗한 대통령’을 자임한 박근혜 정부에서 전현직 대통령비서실장 3명이 연루돼 있고 이완구 총리는 ‘걸어다니는 폭탄’이 돼버렸다. MB정부 기획사정이 단박에 박근혜 정부 ‘자해사정’으로 풍향이 바뀌었다. 박근혜 정부로서는 고해성사하고, 검찰의 성역 없는 수사를 보장해 읍참마속(泣斬馬謖)하고, 정치자금 개혁을 단행하는 중대 결단을 내리는 길밖에 없다.

김진태 검찰총장은 임기가 8개월가량 남아 있다. 성완종 사건은 김진태 검찰에 ‘독이 든 성배’다. 그가 서울중앙지검에 맡기지 않고 대검 산하에 수사팀을 꾸려 지연과 학연이 없는 문무일 대전지검장을 책임자로 임명한 것은 명예를 걸고 뭔가 해보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젊은 평검사 시절부터 특별수사통으로 알려진 그가 30년 검사의 직을 마지막으로 걸어야 하는 시기가 왔다.

황호택 논설주간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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