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SNS에서는]“억울합니다”… ‘일못’들의 반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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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서를 다 작성해놓고 상사에게 업데이트하기 전의 파일을 보내 혼났어요.”

“USB가 안 돼서 며칠 동안 해결하려 난리쳤는데…. 컴퓨터에 반대 방향으로 꽂았더군요.”

“두세 시간 걸릴 일 같은데, 전 왜 일곱 시간이 걸릴까요? ㅠㅠ”

오늘도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각종 ‘일 못한’ 에피소드가 넘쳐납니다. 반가운(?) 소식들. “나도 그래!”라고 외치며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솟구칩니다. 별로 자랑하고 싶지 않을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들이 대체 누구냐고요? 바로 페이스북 페이지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에 가입한 일명 ‘일못’ 회원들입니다.

개설된 지 9개월째 되는 이곳의 19일 현재 가입자는 4769명. 비공개 페이지임에도 회원은 나날이 늘고 있습니다. 직장동료가 있을까봐 소심하게 ‘눈팅’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페이스북 계정을 하나 더 등록해 이용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입니다.

페이지를 만든 운영자는 당당히 일못임을 자처합니다. 시민단체에서 일했다는 그는 불현듯 본인이 심각한 일못임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복잡한 보고서를 만들고 조직생활의 룰을 따라야 하는 게 자신과 맞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그는 본인이 일못이라는 사실에 주눅 들지 않습니다. 한 주간지의 칼럼 필진으로도 활동하는 그는 “당신도 일못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더불어 “내 글이 별로라면 나를 섭외한 기자가 일못”이라고 외치지요.

일못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평범한 직장인부터 알바생, 대학원생, 언론인까지 회원은 실로 다양합니다. 어리바리한 사회 초년생도 꽤 많이 보입니다. 밥 먹듯 만들어내는 오타, 계산기를 두드려도 틀리는 셈, 방금 들은 내용도 돌아서면 까먹는 놀라운 기억력 등…. 실수 내용들도 어쩜 그리 내 얘기 같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일못들은 때론 억울하답니다. 사실과 다르게 일못으로 규정되는 사례가 흔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런 글을 올립니다.

“팀장, 부장까지 사인 다 받고 대표한테 까였는데 저만 일못인가요? 그러면서 팀장님은 저한테 자기 욕먹게 하지 말랍니다.”

“왜 일을 한 번에 3, 4개씩 주고는 동시에 당장 해내라고 합니까, 퇴근도 못 하게.”

이런 글을 접하는 일못 회원들은 분개합니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주면서 “대체 우리가 왜 욕을 먹어야 하느냐”고 따집니다. 회원들의 소속감은 이 같은 울분을 공유하며 비로소 굳건해집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잠재적 일못’입니다. 일못은 상대적인 개념이기도 하니까요. 성격과 호흡이 맞지 않는 상사와 일할 때, 조직의 이익에 반해 소신껏 행동할 때, 윗사람의 의중과는 다른 아이디어를 내놓을 때….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일못이 되지 않을까요? 일못 회원들이 단순히 실수만 거듭하는 애물단지가 아닌 이유입니다.

운영자는 일못 페이지가 일을 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함께 고민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원한다고 합니다. 투덜대던 일못들은 자연스레 ‘노동권’ 같은 이슈에 관심을 갖습니다. 억울하게 해고를 당한 알바생들, 정규직 전환을 약속받았지만 강제 퇴사를 당한 비정규직을 안타까워합니다. 그래서 상사에게 당당히 자신의 권리를 요구했다는 글, 고생 끝에 정규직으로 전환됐다는 글 등이 올라올 때면 그 어느 때보다 반응이 뜨겁습니다. 어이없는 실수담보다 이런 글들에 ‘좋아요’와 ‘댓글’이 폭발하곤 합니다.

어쩌면 일못 페이지는 회원들에게 끊임없이 묻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일못을 자칭하는 그대들이 정말 일못이 맞는지. 구조적인 문제를 무조건 개인의 탓으로 돌리며 괴로워하는 건 아닌지. 때론 충고가 아닌 인격모독적인 발언을 듣고도 ‘내가 일을 못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머리를 쥐어뜯는 건 아닌지. 자잘한 실수를 반복해 남은 물론이고 본인까지 피곤하게 만드는 건 자랑이 아닙니다. 하지만 한 번의 사소한 ‘일못’ 경험으로 지나친 좌절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억울할 땐 일못 페이지 같은 대나무 숲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고 소리치듯 한마디 내뱉고 훌훌 털어보는 건 어떨까요. 함께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 여기 있습니다.

최지연 오피니언팀 기자 lima@donga.com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소속감#울분#잠재적 일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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