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야크와 함께하는 내 마음의 그곳]오은선의 ‘북한산 인수봉’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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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봉 암벽과 놀다보면 ‘모든 세상 어법은 똥’이더라!

파리가 황소 뿔에 잠시 앉았다고, 파리가 황소를 정복한 것인가. 사람이 에베레스트 꼭대기에 잠시 올랐다고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것인가. 산에게 인간은 잠시 스쳐 가는 바람일 뿐. 그렇다. 북한산 인수봉은 나에게 아버지의 너른 등판 같은 놀이터였다. 그곳에서 나는 어릴 적 맨발로 나무를 오를 때처럼 천방지축 한세상 모르고 뛰어놀았다. 그때마다 온갖 시름이 사라지고 분노와 울혈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숫눈이 목화솜발처럼 날리는 북한산 영봉에서 추억에 젖은 오은선. 오른쪽 저 너머로 인수봉이 빙그레 소웃음을 짓고 있다. 북한산=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파리가 황소 뿔에 잠시 앉았다고, 파리가 황소를 정복한 것인가. 사람이 에베레스트 꼭대기에 잠시 올랐다고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것인가. 산에게 인간은 잠시 스쳐 가는 바람일 뿐. 그렇다. 북한산 인수봉은 나에게 아버지의 너른 등판 같은 놀이터였다. 그곳에서 나는 어릴 적 맨발로 나무를 오를 때처럼 천방지축 한세상 모르고 뛰어놀았다. 그때마다 온갖 시름이 사라지고 분노와 울혈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숫눈이 목화솜발처럼 날리는 북한산 영봉에서 추억에 젖은 오은선. 오른쪽 저 너머로 인수봉이 빙그레 소웃음을 짓고 있다. 북한산=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1986년 어느 봄날, 수원대산악반 오은선(당시 20세)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설렘 반, 두려움 반. 꿈에 그리던 북한산 인수봉(810.5m) 첫 등반길에 나선 것이다. 바로 눈앞에 매끈하고 우람한 바윗덩어리가 떡 버티고 서 있었다. 밑쪽 둘레 400∼500m, 높이 약 200m의 화강암 덩어리. 여의도 63빌딩(264m)보다 조금 낮지만 풍채는 훨씬 우아했다.

“초보자들이 거치는 인수A코스(우정B코스였던가?)를 탔는데, 맨앞 선등은 동기생 (이)서균이가 맡고 그 뒤를 나하고 동기생 친구인 (최)명자가 따랐던 것 같다. 맨 뒤 후등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서균이는 동기이지만 일찍부터 산을 타서 베테랑 수준이었다. 또 다른 팀은 (신)동석 형이 선등을 하고 그 뒤를 신참들이 따랐다. 처음엔 속으로 엄청 떨었지만, 이내 봄볕에 덥혀진 바위의 따스하고 우둘투둘한 질감이 참 편안하게 느껴졌다. 한 발 한 발 자벌레처럼 기다 보니 어느새 정상이었다. 너무 좋아 펄쩍펄쩍 뛰었다.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형들이 ‘초짜들은 대부분 파김치가 되는데 너처럼 좋아하는 애는 처음 본다’며 혀를 내둘렀다.”

마침 정상엔 수원대산악반뿐이었다. 한갓지고 호젓했다. 빙 둘러앉아 오붓하게 요기를 했다. 꿀맛이 따로 없었다. 오은선과 최명자는 간단한 ‘인수봉 초등 소감’도 피력했다. 도란도란 정겹고 흥겨웠다. 노래는? 글쎄, 했던가! 안 했던가! 어쨌든 그들은 억세기로 짜∼한 산악반의 ‘홍이점’이었다. 남자 형들의 예쁨과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어른 되면 저곳에 꼭 올라가리

초등학교 5학년 도봉산 소풍 때 친구들과 함께(가운데가 오은선). 이 당시 버스 차창밖으로 인수봉을 보며 ‘언젠간 꼭 올라가겠다’고 다짐했다.
초등학교 5학년 도봉산 소풍 때 친구들과 함께(가운데가 오은선). 이 당시 버스 차창밖으로 인수봉을 보며 ‘언젠간 꼭 올라가겠다’고 다짐했다.
친구 최명자도 달뜨긴 마찬가지였다. 시종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듯했다. 명주실 같은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왔다. 긴 생머리가 살풋살풋 날리고, 종달새처럼 재잘재잘 수다를 떨었다. 사실 오은선에게 인수봉은 친숙했다. 어릴 적부터 그의 집(서울 면목동)에서 늘 보고 자란 덕분에 낯선 느낌은 전혀 없었다.

“인수봉을 직접 가까이서 처음 본 것은 중곡초등학교 5학년 때 버스 타고 도봉산 소풍 가는 도중 그 앞을 지나면서였다. 차창 밖으로 거무튀튀한 바위들이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우와! 어마어마했다. 멀리서 본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때 어린 마음에도 뭔가 ‘찌르르’ 하는 전기가 왔다. 뭐에 홀린 듯 나도 모르게 ‘어른이 되면 꼭 저기에 올라가 봐야지’하고 다짐했다. 아마도 그때가 나의 히말라야 산악인생의 시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은선이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가속페달을 밟은 것은 2007년 7월 K2(8611m) 등정 이후였다. 그때까지 8000m급 5개에 오르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최초 완등’에 한번 도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라이벌 스페인 바스크족 에두르네 파사반(1973∼)은 9개, 오스트리아 게를린데 칼텐부르너(1970∼)는 10개를 마친 상황이었다.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꿈이었다. 하지만 오은선은 15개월 동안 8개의 8000m급 봉우리에 오르며 단숨에 그들을 제쳐 버렸다.

2008년 마칼루(8463m·5월 13일)에 오른 뒤 카트만두에서 1주일 쉰 뒤, 딱 6일 만에 로체(8516m·5월 26일)에 올랐다. 2009년엔 칸첸중가(8586m·5월 6일) 등정 후 카트만두 시내로 내려와 1주일 쉬고, 헬리콥터로 베이스캠프로 이동해 7일 만에 다울라기리(8167m·5월 21일) 정상에 섰다. 2009년 낭가파르바트(8126m·7월 10일)과 가셔브룸Ⅰ(8068m·8월 3일) 등정도 비슷했다. 2008, 2009년 한 해 4개씩 8000m급 정상에 오른 것이다.

칼텐부르너도 2005년 3개 정상에 올랐지만, 그 이후부턴 1년에 하나씩밖에 못 올랐다. 파사반 역시 2003년 3개 봉우리가 최다였다. 더구나 오은선은 나이가 파사반보다 7년, 칼텐부르너보다 4년이나 많았다. 몸피도 그들에 비하면 땅콩(155㎝, 50㎏)에 불과했다.

보통 히말라야에 한번 갔다 오면 기억력이 눈에 띄게 떨어진다. 고산이라 산소 공급을 충분히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산에서 내려와 뇌 수술하는 경우도 흔하다. 자신의 전화번호가 생각이 안 나고, 친구를 앞에 두고도 이름이 안 떠올라 발을 동동거린다. 남자는 한동안 정자형성이 안 된다. 여자는 배란기에 문제가 생긴다. 운전대도 한참 시간이 지나야 잡을 수 있다. 그런데 오은선은 15개월 만에 8개의 8000m급 봉우리를 올랐다. 가히 ‘무쇠 여인’이다.

8000m급 더 오를
생각 없어

“당시 나는 히말라야에 완전 몰입했다. 무당이 신들림으로 무병(巫病)에 들듯, 난 산병(山病)에 걸렸다. 모든 생활이 ‘산에 의한, 산을 위한, 산의 삶’이었다. 행여 다칠세라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했다. 체력을 다지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2008년 5월 마칼루 등반 후 연이어 오른 로체에선 몸의 에너지가 완전히 방전돼 버렸다. 하산할 땐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텐트 앞 100m 지점에서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두 달 후인 7월 다시 브로드피크등정에 나섰다. 그건 ‘완전 몰입’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칸첸중가 등정 논란은 오은선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사방이 온통 벽이었다. 그토록 따랐던 선배들도, 한국산악계도 온통 오은선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 댔다. 배신감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 혼자 산골에 처박혀 진한 속울음을 울었다. 그래도 가슴에 천불이 났다. 그때마다 주위 산자락을 뱅뱅 수없이 돌고 또 돌았다. 만약 가족이 없었다면 어찌됐을까. 엄마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며 다독였다. 막냇 동생은 기꺼이 그의 손발이 돼 주며 언니의 투정을 받아주었다. ‘딸 바보’ 아빠는 힘내라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난 나의 칸첸중가 등정을 100% 확신한다. 그러기 때문에 전혀 다시 오를 생각이 없다. ‘정상수집가’니 ‘가미카제’(파사반의 말)니 하는 말에도 개의치 않는다. 난 나만의 꿈을 꾸었고, 그 꿈에 도전해서 이루었을 뿐이다. 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의 방식으로 오르면 그만이다. 이제 8000m급 산에 올라갈 마음이 전혀 없다. 정상도 중요하지만 안전하게 살아서 내려가는 게 더욱 중요하다. 죽으면 무슨 소용인가. 이젠 좋은 남자 만나, 평범하게 가정 꾸리고, 남편 밥해 주며 살고 싶다. 물론 난 산 빼놓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도 산의 품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오은선은 인수봉을 수백 번도 더 올랐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인수봉에 오르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끓어오르던 분노도 눈 녹듯 사그라졌다. 저잣거리 사바세계의 온갖 다툼도 스르르 잊혀졌다. 그렇다. 인수봉은 그에게 ‘피안의 세계’였다. 네팔 히말라야의 곰파(절)가 그대로 옮겨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눈부신 달밤의 인수봉은 더욱 그랬다. 너무 황홀해 숨이 막혔다. 힘들 때면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너른 아버지 등짝 같은 암벽!’ 인수봉.

“히말라야 거대 암벽은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하다. 과연 내가 저 바위에 오를 수 있을까. 두려움이 물밀듯이 밀려 온다. 하지만 인수봉은 엄마 품처럼 푸근하다. 언제라도 응석 부리며 기댈 수 있다. 인수봉은 서울 면목동 우리 집에서도 잘 보인다. 내 방 들창문을 열면 그 헌헌장부처럼 잘생긴 모습이 확 눈에 들어온다. 그때마다 ‘안녕 인수봉’ 하고 마음속으로 인사를 한다.”

북한산=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오은선은… ▽1966년 전북 남원 출생 ▽수원대 전산학과 졸업 ▽1997년 가셔브룸Ⅱ 등정 ▽2004년 에베레스트 등정 ▽2006년 시샤팡마 등정 ▽2007년 초오유(5월), K2(7월) 등정 ▽2008년 마칼루, 로체(이상 5월), 브로드피크(7월), 마나슬루(10월) 등정 ▽2009년 칸첸중가, 다울라기리(이상 5월), 낭가파르바트(7월), 가셔브룸Ⅰ(8월) 등정 ▽2010년 안나푸르나(4월 27일) 등정

▼ 인수봉 꼭대기서 미리 주문… 이젠 후배들 포식시키는 왕초 ▼
오은선의 인수봉 하산길 단골집 ‘거북이네’


서울 우이동 도선사 가는 길엔 ‘거북이네(02-907-8558)’ 식당이 있다. 30년 가까이 수원대 산악반 하산길 단골집이다. 인수봉 하산길엔 으레 이 집에 들러 밥과 막걸리를 곁들였다. 그날 클라이밍의 품평회도 하고, 개인 소회도 들었다. 다들 피곤한 데다 집들이 멀어 보통 1차로 ‘담백하게’ 끝났다.

식당 벽 한쪽엔 수원대 산악반의 나무 사서함이 지금까지도 매달려 있다. 사서함을 열면 선후배들의 시시콜콜한 메시지가 들어 있다. 오다가다 한두 마디씩 써 놓는 메모 공책이 눈길을 끈다. 누가 첫째를 낳았다느니, 어디로 이사했다느니 하는 것들이다.

요즘 오은선은 후배들 몰고 다니는 왕초다. 봄가을에 자주 찾는다. 하산하기 전 인수봉 꼭대기에서 미리 식당에 주문해 놓는다. 스스로 ‘밥순이’라 할 정도로 뭐든 잘 먹는다. 옛날엔 고 박영석 대장도 자주 찾았다. 박 대장이 오는 날엔 왁자하고 시끌벅적했다. 오은선은 늘 말이 없이 조용했다. 주로 후배들 이야기를 듣거나, 분위기를 맞춰 주는 스타일이었다. 안주인 하석순 씨(58)는 “오은선 대장은 우리 가족과 같다.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한결같다. 단골이라고 티 낸 적도 없고, 음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한 적도 없다. 식성은 뭐든 가리진 않지만 대체로 두부찌개 등 채소류를 좋아한다. 하지만 후배들과 같이 올 땐 옻닭, 전골 등 푸짐하게 시킨다. 그저 조용히 후배들 이야기를 들으며 웃다가, 슬며시 돈을 내고 간다. 정말 여성답다”고 말한다.

▼ 칸첸중가 정상에 섰나, 못 섰나

오은선(1966∼)은 과연 칸첸중가(8586m) 정상에 섰나, 못 섰나. 물론 본인은 당연히 “섰다”이다. 오은선의 라이벌인 스페인의 바스크족 에두르네 파사반(1973∼)은 “의심스럽다. 오은선이 증명하라”는 입장이다. “내가 올랐던 칸첸중가 정상 사진엔 눈밖에 없는데 오은선 사진엔 바윗돌이 보인다”는 이유다.

오은선은 “정상엔 눈보라가 몰아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5∼10m 내려와 암반에서 사진을 찍었을 뿐”이라고 덧붙인다. 오은선을 뒤따라 바로 칸첸중가에 오른 노르웨이팀 욘 강달도 “맞다. 나도 그 바위 사진을 찍었는데 정상에서 5∼10m 떨어진 곳이다. 그 정도는 통상 정상으로 인정된다”고 말했다.

같이 올랐던 셰르파 3명 중 오은선 앞에 섰던 베테랑 다와 옹추와 페마 치링은 “더는 올라갈 곳이 없었고 거기가 분명 꼭대기였다”고 말한다. 오은선 뒤를 따르며 촬영을 했던 젊은 체지 누루부는 처음엔 “정상이 아니었다”고 했다가 나중엔 “착각했다”고 말했다(오은선은 누루부에게 동상 치료비만 주고 미처 그때까지 보상금은 챙겨주지 못했었다).

대한산악연맹은 칸첸중가를 다녀온 국내 산악인들을 소집해 논의한 끝에 “정상에 올랐다고 보기 어렵다”고 발표했다. 그 논의에 참가했던 엄홍길 씨는 “그런 결론에 동의한 적 없다. 오은선 씨의 말을 믿는다”고 말했다. 한국산악연맹도 “오은선의 칸첸중가 정상 등정을 인정한다”는 입장이다.

히말라야 모든 기록은 엘리자베스 홀리 여사(90)로 통한다. 홀리는 이 분야 최고 권위자다. 그는 이 문제를 ‘논쟁 중(disputed)’으로 남겨 놓았다. 현재진행형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난 그녀의 등정을 100% 믿는다. 오은선은 불쌍한 여자다. 믿을 수 없는 위업을 이뤄 냈으나 제대로 평가도 받기 전에 상처를 입었다. 한국의 어느 산악인은 나를 찾아와 오은선의 등정 의혹에 대해 브리핑까지 했다. 결국 이 문제를 풀 해답은 한국에 있
다(월간 ‘사람과 산’ 11월호)”고 말했다. 오은선은 2010년 4월 27일 안나푸르나를 끝으로 14좌 완등에 성공했다. 파사반은 그해 5월 17일 시샤팡마에 오르며 14좌 등정을 마쳤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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