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작은 나라’의 허무정치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29일 22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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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비대화와 권력남용 심각… 국민은 왜 정치인 먹여살려야하나
민주주의 하겠다며 민생 내팽개쳐… 위기국가를 더 절망케 하는 정치
정치인이여 우물에서 뛰쳐나오라, 그리고 세계를 보고 국민을 보라

배인준 주필
배인준 주필
지난주 도쿄에서 만난 한 일본인 교수는 내게 “한국은 작은 나라로서, 잘 생각하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한일 관계, 대미대중(對美對中) 관계에 관해 얘기하던 중이었다. 본뜻이 진심어린 충고에 있건 가시를 숨긴 경고에 있건, 小さい國(지이사이쿠니·소국) 한국이라는 한마디가 내 머리에 계속 남았다.

한국은 많이 발전했다. 1세기 전 일본에 먹혔고, 세계인들이 ‘가망 없는 나라’로 여겼지만 우리는 당당히 일어섰고 크게 성공했다. 지난날의 미개(未開)와 빈곤을 생각할 때 기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어깨를 겨루기에는 덩치가 몇 배나 큰 중국과 일본이 양쪽에 버티고 있다. 그나마 한미동맹이 있어 중국도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않지만 한미동맹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에 대해 수없이 굴욕을 맛봐야 하는 한국이다. 일본한테는 피해국이었으니까 큰소리도 치지만 그들의 군사 경제 과학기술 정보력을 뛰어넘기는 역부족인 한국이다. 북한 체제에 대한 경제적 승리를 자랑했지만 평양의 핵 놀음에 속수무책인 한국이다. 발을 미국에 딛고 있기만 하면 언제까지나 안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좋을 때 활짝 웃는다고 강대국들이 날카로운 발톱까지 빼지는 않는다. 우리가 자칫 헛발질하면 미일에 무시당하고 중국에 멸시받으며 고립될지도 모른다.

어떤 외풍에도 꿋꿋이 버티며 홀로서기에는 여전히 작은 나라, 더구나 희망보다 불안의 안개가 더 짙게 깔려 있는 나라, 이것이 한국이다. 고성장국가 반(班)에서 저성장국가 반으로 강등된 채 부활의 합창이 사라졌다. 새로운 성장엔진은커녕 돌고 있던 엔진마저 하나둘 꺼지고 있다. 재벌이라고 질시 받는 대기업집단도 몇 개를 빼고는 거의가 국제경쟁력이 없다. 일자리 없는 복지는, 정부도 국민도 감당할 수 없는 약속의 수렁에 빠져 있다. 게으른 나눠먹기 국가, 빚으로 땜질하는 경제로는 미래가 없다. ‘제2의 한강의 기적’은 국민 누구의 가슴도 뛰게 하지 못하는 대통령 어록이 되고 있다. 우리가 이룩한 경제적 성취란 것도 어쩌면 여명의 화려함으로 착각한 저녁노을이었는지 모른다. 한국경제의 내일 새벽이 반드시 오리라는 확신도 없다.

이런 위기국가를 더욱 절망하게 하는 것이 정치(政治)이다. 온 나라가 정치적 내전으로 지새우고 있다. 정치가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민까지 덩달아 편갈려 싸우게 만든다. 국민 저력을 다 끌어모아도 위기 탈출이 어려운 판에 남북으로 갈린 나라를 또 두 쪽 내는 것이 오늘의 한국정치이다.

민주주의를 회복하겠다고 하는데 민주주의는 정말 죽어서 문제인가, 아니면 과잉이라서 문제인가. 다수결로도 모자라 60%가 찬성하지 않으면 법 하나도 제대로 만들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일자리에 목이 걸린 수많은 젊은이와 구직자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될 투자 촉진법을 가로막는 것은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인가. 지금 정말로 살려내야 할 것은 거품 낀 민주주의인가, 주저앉는 경제와 민생인가.

국가기관의 권력남용을 법으로 엄격하게 다스리는 것은 법의 지배와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길이다. 그러나 국가정보원 댓글을 둘러싼 야권의 과도한 정치공세는 오히려 법의 지배를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정원 댓글 문제가 민주주의 차원에서 중요하다고 해도 이 문제에 정치력을 소진하면 경제와 민생이 그 기회비용을 치른다.

한 인간의 작은 몸도 100% 건강하기 어렵다. 하물며 5000만 국민의 나라에 이런저런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이런 일들은 각각 법이 정하는 절차에 따라 처리하고, 정치는 나라의 장래를 위한 근본과제들에 늘 새롭게 도전해야 마땅하다. 국민이 정치인들을 먹여 살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정치는 국회와 지방의회, 의원과 그 보좌관들까지 권력의 칼을 휘두르기에 바쁘다.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면서 민간기업인까지 무더기로 국회에 불러 호통을 치고 경영권을 쉽게 침해한다. 이야말로 권력남용이다. 국회의원들이 기업인들을 불러놓고 누리는 고함(高喊)민주주의는 기업가정신과 투자하고 싶은 마음을 쇠퇴시킨다는 점에서 반(反)민주에 가깝다. 국내의 수많은 내수산업은 다 죽어 가는데 정치라는 내수산업만이 활황인 나라, 이런 나라에 미래가 있겠는가.

2300년 전 중국의 장자(莊子)는 “우물 안 개구리와는 바다를 논할 수 없다네”라고 했다. 세계 대세와 질서 변화를 논하며 국가와 국민의 앞날을 제시하는 정치, 우물 안에서 뛰쳐나온 그런 정치는 영영 난망일까.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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