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72>물소리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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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
―조정권(1949∼)

“그럼 저녁 6시 마로니에에서 보십시다”
퇴근 후 식어가는 찻잔을 앞에 두고
두 시간 여를 기다리다가
한 시간을 더 기다려보다가
어둠 속으로 나와 전철 타러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데
그 밤 어둠 속 마로니에 나무 밑에. 아!
이성선 시인이었다.
“조형이 마로니에라 하기에 이 나무 아래서 만나자
는 줄 알았지요.”
속초에서 예까지 짊어지고 온 몸이
계곡물소리를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그 물소리가 나를 씻어주고 있었다.
그 밤, 몸은 내게 무슨 말을 전하려고 했을까
갯벌처럼 무겁게 누워 밤새도록 뒤척이다 그냥 간
몸은.


약속 시간을 세 시간도 더 넘겨 만나는 두 사람. 서로 약속 장소를 달리 알아서 생긴 에피소드다. 휴대전화가 대중화된 요즘이었더라도 어쩐지 이 둘은 그렇게 기다렸을 것 같다. 툭하면 삐치고, 조금 기다리다 그냥 가버리는 우정이 아니다. 언제까지라도 기다려 줄 수 있는 신뢰가 있고 내색하지 않아도 마음을 헤아리는, 나이 든 남자들의 곰삭은 우정이 싱그럽다.

얼마나 반가웠을까. 얼굴만 봐도 반가운 친구가 말도 예쁘게 한다. “마로니에라 하기에 이 나무 아래서 만나자는 줄 알았지요.” 심성이 일급 청정수 같을 친구가 계곡 물소리로 화자의 마음을 씻어준다. 화자가 친구와 만나자고 한 장소 ‘마로니에’는 아마 화자 직장 근처에 있는 ‘마로니에 카페’일 테다. 화자는 무의식적으로 환유(換喩)를 사용했다. ‘날개 돋친 듯’ ‘파리 날리다’ 등 우리 언어생활에는 무수하게 환유가 쓰이고 있다. 그런데 환유, 곧 비유는 바로 그것이 아니고 생략하거나 비틀어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기에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래서 친구는 마로니에 나무 아래서 어둡도록 기다린 거다.

나란히 자리를 펴고 누운 그 밤, 친구는 잠 못 이루고 무겁게 몸을 뒤척인다. 깊은 우정으로도 헤아리지 못한, 다만 느낀 친구의 번뇌. 오래전 물소리 들리는 듯, 세상을 버린 친구에 대한 화자의 슬픔과 정이 촉촉이 전해진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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