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세상 어디에도 없는 옥탑방 은하네의 대한민국 탈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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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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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동물원’ 각색한 김은성 극작가의 ‘달나라 연속극’ ★★★★

1930년대 대공황 이후 무너진 중산층 가족의 비극을 다룬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을 21세기 서울 옥탑방에 쫓겨들어간 가족들의 블랙코미디로 바꾼 ‘달나라 연속극’. 한쪽 다리를 저는 맏딸 은하(배선희·오른쪽)가 추석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고 있다. 극단 달나라동백꽃 제공
1930년대 대공황 이후 무너진 중산층 가족의 비극을 다룬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을 21세기 서울 옥탑방에 쫓겨들어간 가족들의 블랙코미디로 바꾼 ‘달나라 연속극’. 한쪽 다리를 저는 맏딸 은하(배선희·오른쪽)가 추석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고 있다. 극단 달나라동백꽃 제공
지난해 우리 연극계가 연출가로는 ‘김광보의 해’였다면 극작가로는 ‘김은성의 해’라고 할 만했다. 김은성(36)은 지난해 무려 4편의 희곡을 무대에 올렸다. 두산아트센터에서 기획한 ‘목란언니’와 ‘뻘’, 그리고 자신이 대표로 지난해 창단한 극단 달나라동백꽃에서 올린 ‘달나라 연속극’과 ‘로풍찬유랑극단’이다.

이 중 가장 주목받은 작품은 ‘목란언니’다. 북한 엘리트 집안 출신으로 탈북했던 여성이 다시 월북을 시도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사연을 담은 이 창작극은 동아연극상 희곡상과 대한민국연극대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이에 앞서 김은성은 40세 이하 젊은 예술가를 선정해 후원하는 연강예술상까지 수상했다.

다른 세 작품도 평단의 고른 지지를 받았다. 이들 세 작품은 서양의 명작 희곡을 한국적 상황에 맞춰 재창작하는 데 능수능란한 전형적인 김은성표 연극이다. ‘뻘’은 체호프의 ‘갈매기’를 1980년 광주의 아픔을 겪은 전남 벌교의 한 가족사로 풀어냈다. ‘로풍찬유랑극단’은 세르비아 극작가 류보미르 시모비치의 ‘유랑극단 쇼팔로비치’를 6·25전쟁 전후 좌우갈등이 극심했던 전남 보성의 한 마을의 비극으로 직조했다.

‘달나라 연속극’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미국의 몰락한 중산층 가족을 그린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을 21세기 서울의 옥탑방 가족 이야기로 바꿨다. 앞의 두 편이 현대사를 가로지른다면 ‘달나라 연속극’은 동시대성이 가장 뚜렷하다.

그 ‘달나라 연속극’이 연초부터 90석 규모의 소극장에서 재공연 중이다. 연출과 무대미술은 작가와 함께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를 다닌 부새롬 씨(37)가 맡았다. 4명의 배우는 어머니 여만자 역의 성여진 씨를 제외하고 모두 새 얼굴로 바뀌었지만 작품의 가슴 뭉클한 웃음과 여운은 여전하다.

무대는 서울 이문동 2층 주택 옥탑방. 인근 대학 청소부인 어머니 만자, 한쪽 다리를 저는 큰딸 은하(배선희), 그리고 고졸 학력으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는 아들 은창(허지원)의 보금자리다. 원작에선 은창이 냉철한 현실주의자이고 두 모녀는 과거의 추억에 사로잡혀 사는 현실도피적 몽상가다.

연극에선 결이 좀 다르다. 만자는 계약직 청소부 자리를 어떻게든 지키려는 억척어멈이고 은하는 자신이 가족에게 짐밖에 안 되는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하는 천사표다. 오히려 영화감독을 꿈꾸는 막내 은창이 몽상가에 더 가깝다. 다만 그의 몽상은 나른한 현실도피가 아니라 매서운 현실비판에 기초한다.

이는 은창이 시나리오로 구상 중인 SF영화 ‘일’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일은 기생충 이의 미래 변종으로 사람의 몸뿐 아니라 내장까지 침투해 생존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미래사회 인류를 공포에 몰아넣는데 특이하게도 일은 옥탑방에 1년 이상 산 사람에게는 접근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강북의 옥탑방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반면 강남의 고층아파트 값은 추락하는 새로운 부의 재분배가 일어난다.

연극에는 이렇게 숫자를 활용한 웃음코드가 넘친다. 은창네 옥탑방 아래 2층집에 사는 대학원생으로 은창네에서 은하와 짝지어 주려는 이일영(강기둥)의 별명은 ‘시한폭탄’이다. 그의 이름이 시한폭탄이 터지기 전에 카운트다운하는 숫자 순이라서다. 또 집안에 있는 시간이 많은 은하에겐 특별한 재주가 있는데 원주율의 소수점 이하 숫자를 5000자리까지 암기한다. 그 비결은 연이은 숫자의 발음에 맞춰 짤막한 스토리를 만들어 붙이는 것. 일영은 이를 보고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연속극”이란 뜻에서 ‘달나라 연속극’이란 이름을 붙여준다.

연극이 진짜 말하고픈 것은 현실도피적 TV드라마에 취해서 진짜 현실을 외면하려는 한국인들의 심성에 대한 서글픈 풍자다. 진짜 현실은 ‘달나라 연속극’ 취급이나 받고 ‘백마 탄 왕자’와 신데렐라 신드롬에 젖은 가짜 연속극만 판치는 세상에 대한 블랙코미디다.

만자의 사연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송사 PD가 되지만 정작 은하와 그 가족을 버리고 떠나는 일영은 바로 그런 우리들의 부끄러운 초상이다. ‘유리동물원’에서 모녀를 버리고 떠나는 은창은 여전히 가족을 지킨다. 그 대신 트위스트 선율에 맞춰 자신들의 꿈을 앗아간 현실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한판 춤을 춘다. 운명과도 같은 엄마야, 누나야의 손을 잡고.

: : i : :

27일까지 서울 대학로 연우소 극장. 2만 원. 02-6349-4721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달나라 연속극#유리동물원#김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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