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3>세상 끝의 봄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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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의 봄
―김병호 (1971∼ )

수도원 뒤뜰에서
견습 수녀가 비질을 한다

목련나무 한 그루
툭, 툭, 시시한 농담을 던진다

꽃잎은 금세 멍이 들고
수녀는 떨어진 얼굴을 지운다

샛길 하나 없이
봄이 진다

이편에서 살아보기도 전에
늙어버린, 꽃이 다 그늘인 시절

밤새 혼자 싼 보따리처럼
깡마른 가지에 목련이 얹혀 있다

여직 기다리는 게 있냐고
물어보는 햇살

담장 밖의 희미한 기척들이
물큰물큰 돋는, 세상 끝의 오후


봄 풍경으로 ‘세상의 모든 가을’을 보여주는 듯, 정갈하고 고적한 시다.

‘밤새 혼자 싼 보따리처럼’…. 어쩌면 이렇게 표현했을까! 견습 수녀의 수도원에 들기 전 마음 한 자리를 엿보게 하는 한편, 깡마른 나뭇가지에 해쓱하게 얹힌 목련 꽃이 선연히 떠오른다.

‘꽃이 다 그늘인 시절.’ 젊음이 다 그늘인 어떤 인생. 봄기운으로 생동하는 속세의 기척에 수도원 담장 안 오후의 햇살이 세상 끝인 양 아득해진다. 아득하면 깊으리. 울림이 깊은 이 시처럼, 시 속의 견습 수녀도, 그리고 젊어 본 적 없이 나이 든, 봄여름 없이 훌쩍 가을인 사람들도 그 삶이 더욱 깊으리라.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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