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호의 옛집 읽기]<16>경주 교동 최준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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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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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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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흔히 최부자 고택이라고 부르는 집이다. 1700년대에 지어진 집으로 건축적으로, 정신적으로, 조선시대 대지주 종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건물의 많은 부분이 소실되어 원래의 모습을 짐작하기가 어려웠지만 최근 1928년 일본잡지 ‘건축화보’에 실린 배치평면도가 발견되면서 전모를 알 수 있게 되었으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지금 사랑채가 복구되었지만 ‘건축화보’에 실린 배치평면도를 보면 사랑채 서편에 별당이 있었고, 안채 동편에 커다란 곳간이 자리 잡고, 다시 안채 대문 바깥에 더 큰 곳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남쪽으로 정원이 꾸며진 걸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이 집의 원래 규모의 반도 안 되는 규모다.

이 어마어마한 대지주의 종가에서 특히 내 마음을 사로잡는 공간이 사랑채 뒤쪽에서 사당으로 가는 길이다. 최준 고택은 곳간이 두 채가 있지만 사실 이 터의 안산인 도당산이 풍수상 창고사라고 불리는 곳간 형상이다. 그런데 집 뒤의 주산이 약하다. 그래서 이 집의 북쪽에는 쌍으로 심어진 나무가 무성하다. 일종의 비보림(裨補林·부족한 곳을 채우는 나무)인 것이다. 이 비보림이 뒷산에서 사당을 통해 사랑채까지 이어진다. 사당은 보통 집의 동쪽에 위치하는데, 이 집은 방위보다는 터에서 가장 높은 곳을 잡다보니 서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여느 종가보다 사당이 높지 않고 편안한 곳에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 잡고 있어 늘 푸근하다.

그러나 이렇게 곳간 형상의 안산이 있고, 비보림으로 약한 지세를 꾸몄다고 해서 아무나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경주 최씨가 오랫동안 부를 일굴 수 있었던 것은 이 집의 준엄한 가풍 때문이다. 일컬어 ‘육훈’이라고 하는 게 그것이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 지니지 마라.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다섯째, 시집 온 후 3년 동안은 무명옷을 입어라. 여섯째,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 ‘육훈’을 충실히 지키면서 경주 최씨는 12대 만석꾼을 배출했다. 최준은 일제강점기에 백산상회를 설립해 안희제를 통해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댄 바로 그 사람이다. 정직한 자본은 만인을 살리며, 따뜻한 자본주의는 세상을 변화시킨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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