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전 국민이 증인인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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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24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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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에서 한국 측 수석대표였던 민동석 외교통상부 외교역량평가단장은 작년 12월 2일 법정 증언을 한 지 2주 뒤 동아일보에 찾아와 “문성관 판사가 재판을 편파적으로 진행한다. 무죄판결이 나올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판사가 자신의 발언을 지나치게 제지해 “사실관계 확인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말인데 왜 못하게 막느냐”고 항의한 일도 있다고 말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의 불안과 예감은 기막히게 들어맞았다.

검사가 법정에서 그에게 “물대포와 전기충격기로 주저앉는 소(다우너 소)를 강제로 일으켜 세우는 동영상 속의 소들이 광우병에 걸렸거나, 걸렸을 가능성이 높은 소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그건 절대 광우병 소가 아닙니다. PD수첩이 광우병 소로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입니다. 그것은 휴먼소사이어티가 제작한 동물학대 장면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갑자기 문 판사가 “증인이 동영상에 나와 있는 소를 검사했습니까. 증인이 직접 알지 못하는 내용에 대해서도 사실인 것처럼 말하면 위증(僞證)의 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위증의 벌 운운은 거의 위협에 가까운 말이어서 증인을 위축시켰다고 한다. 판사도 현장에 가서 모든 것을 직접 확인해보고 재판하는 것은 아니다.

결론에 짜 맞춘 PD수첩式논리

PD수첩 제작진은 법정에서 당당한 모습으로 민 단장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거나 물병을 건네는 여유를 부렸다. 피고인 측의 김형태 변호사는 3시간 50분 동안 수십 개에 달하는 외국 학자들의 광우병 연구 결과나 논문들을 들이대며 민 단장에게 “논문 내용을 알고 있느냐”고 추궁했다. “변호사는 사건의 본질을 수석대표가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성도 모르고 임했던 부실협상으로 몰아가려는 질문을 계속했지만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고 민 단장은 말했다.

법관은 선입견 없이 공정하게 재판을 진행해 어느 쪽에도 편파적으로 재판을 진행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법관에게 요구되는 규범이요, 윤리다. 최근 서울변호사회가 법관 평가를 해 사법부에 전달한 것도 판사의 재판 진행과 관련한 불만이 높은 데서 기인한다. 재판의 결론은 어차피 한쪽 당사자에게 불리하게 나올 수밖에 없지만 절차가 공정하다면 변호사나 당사자들의 불만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문 판사는 MBC가 사과한 내용이나, 제작진이 번역상 오역이라고 잘못을 시인한 부분까지 ‘잘못이 없다’고 판결했다. 민 단장은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논리를 그쪽으로 짜 맞춘 PD수첩식(式)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법관이나 탐사보도를 하는 PD나 진실을 추구하는 직업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이미 옳다고 믿고 있는 것과 일치하는 정보만 선별해서 받아들이는 유혹에 빠져들면 오판(誤判)이나 오보(誤報)를 내기 쉽다. 동기나 의도가 판단 과정에 개입해 결론을 왜곡하는 현상이다.

강기갑 의원의 공중 부양(浮揚) 장면을 각종 매체를 통해 보지 않은 국민이 거의 없을 것이다. 강 의원의 국회 폭력이나 광우병 PD수첩 사건, 전교조의 시국선언 같은 사건은 언론에 상세히 보도돼 전 국민이 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판사가 공소사실을 잘게 쪼개 기교적(技巧的)인 법 논리로 정치(精緻)하게 엮어놓더라도 국민이 목격한 실제 현실과 다르면 오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번 사태는 법관의 충원 방법이나 자질, 그리고 연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교육의 문제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하는 시각도 있다. 세 판사 중 하나는 386세대의 막내라고 할 수 있지만 둘은 70년대에 출생해 9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사법부에서 386세대는 대부분 부장판사 이상으로 올라가 있다. 한 중견 법관은 최근 젊은 법관들의 튀는 판결을 전교조 교육과 관련지어 해석했다. 학교 현장에서 전교조 교육이 영향력을 확대해가던 시기에 교육받았던 학생들이 사회 각계로 진출해 영향력을 키우면서 생기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오만과 편견’이 빚은 誤判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지내고 최근 개업한 어느 변호사는 “젊은 판사들 사이에는 좌 쪽에는 관대하고 보수 쪽에는 엄격한 흐름이 있다”며 “권위주의 시대의 반작용 같다”고 최근의 판결 경향을 전했다. 실제로 단독판사의 집시법이나 국가보안법 사건 판결에서 실형이 드문 편이다. 이에 비해 화이트칼라 범죄는 양형(量刑)이 무겁다.

법관은 일류대학 나와 사법시험을 합격했다는 엘리트 의식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법률지식 못지않게 사회에서 보편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가치와 이념을 바탕으로 한 균형 감각이 중요하다. 사건을 지켜본 국민에게 낭패감을 안겨준 일련의 판결은 엘리트 법관의 ‘오만과 편견’이 빚은 오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황호택 논설실장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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