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상우의 그림 읽기]겨울나무를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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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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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 유진수, 그림 제공 포털아트
겨울나무 유진수, 그림 제공 포털아트
헐벗은 겨울나무 앞에 섰습니다. 파릇파릇 새순을 내밀던 봄날이 엊그제 같은데 무성하던 녹음과 조락의 계절을 지나 어느덧 인동의 시간을 맞았습니다. 긴 침묵을 예고하듯 앙상하게 드러난 줄기와 가지가 군더더기 없는 생명의 실체를 강조합니다. 한겨울 추위 속에서 나무는 주검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묵묵히 인내의 시간을 보냅니다. 봄부터 시작된 한 해의 생명활동을 마감하고 내년에 다시 시작될 또 다른 한살이를 위해 나무는 한없이 깊은 침잠의 시간을 견딥니다.

세상에 나무가 더 많을까, 사람이 더 많을까. 어린 시절부터 그런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세상에는 나무만큼 사람도 많고, 사람만큼 나무도 많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똑같은 나무나 똑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쌍둥이도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은 지상의 모든 생명체가 ‘천차만별’을 존재의 근거로 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천차만별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어느 날, 별똥별이 떨어져 가슴으로 날아들듯 나무와 사람의 근본을 이해했습니다. 지상에 형상을 드러낸 모든 생명의 차별은 근원적으로 뿌리에서 기인한다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나무의 뿌리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뿌리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뿌리인 그것을 우리는 ‘무의식’이라고 부릅니다. 무의식에 저장된 내용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천차만별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고, 무의식을 모르기 때문에 현재의 문제에 부대끼고 고뇌하는 것입니다. 나무가 보내는 사계처럼 사람도 태어나 성장하고 늙어 죽음으로써 한살이를 완성합니다. 나무는 일 년 단위로, 사람은 일생 단위로 생명활동을 뿌리와 무의식에 저장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가 온갖 풍상과 시련을 꿋꿋하게 견뎌낸 생물학적 인내심의 결과라는 건 비유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입니다. 천차만별한 인간과 천차만별한 인생, 그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이 살아온 생명정보의 누적입니다. 지금의 나는 내 생명활동의 총화이니 운명이나 사주팔자 타령을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한살이를 마감하고 인동의 시간을 보내는 나무 앞에 서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이른 봄의 꽃샘추위에도 잎눈을 틔우고 여름의 폭우와 태풍도 견뎌낸 장엄한 생명의 시간이 대지의 품으로 잦아듭니다. 지난 일 년 동안의 다사다난했던 생명활동에 대해 나무는 아무런 미련도 나타내지 않습니다. 작년의 기억을 앞세워 금년과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죽음처럼 깊은 침묵으로 나무는 묵상합니다. 긴긴 겨울, 나를 버리고 또 다른 나를 잉태하리라, 나를 잊고 또 다른 나를 탄생시키리라. 나무는 자기 영혼의 승화를 위해 속 깊은 침잠의 시간을 받아들입니다. 겨울나기, 그리고 다시 깨어나기. 우리 인간도 그와 같은 순환 고리를 지니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을까요. 긴 겨울 동안 우리도 나무처럼 침묵하고 침잠하며 더 성숙한 생명, 더 심화된 생명으로 거듭나야겠습니다.

박상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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