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137>‘愛人敬天’ 도전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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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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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정치인 장영신

DJ “도와달라” 권유로 정치 입문
국민회의 신당추진위 공동대표에
2000년 ‘제2 고향’ 구로서 출마


장영신 회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해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장 회장이
새천년민주당 구로을지구당 개편대회에서 당원의 환영을 받으며 행사장에 입장하고 있다. 2000년 2월 29일 사진이다. 사진 제공
애경그룹
장영신 회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해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장 회장이 새천년민주당 구로을지구당 개편대회에서 당원의 환영을 받으며 행사장에 입장하고 있다. 2000년 2월 29일 사진이다. 사진 제공 애경그룹
나는 평소 60세가 넘으면 경영에서 한발 물러나 사회에 봉사하며 살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한국여성경제인협회를 맡은 일도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국가와 사회를 위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부분에서 봉사하며 살아보자”는 생각의 일환이었다.

어느 날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어떤 말씀을 하실지 감이 있었던지라 선뜻 응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미 두 번이나 일신상의 이유로 청와대의 연락을 정중히 거절하고 있었는데, 세 번째 연락을 받았다.

대통령이 세 번이나 부르는데 안 간다는 것은 도리가 아닌 듯했다.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은 시장이나 구청장이 불러도 대부분 가는데 대통령이 부르는 데는 도리가 없었다.

당시 애경은 해외 공장 건설을 극비리에 추진하고 있었는데, 마침 다음 날 출국 일정이 잡혀 있었다. ‘당장 내일 중요한 프로젝트 추진 건으로 출국하는데 중요한 결정이 필요한 말씀을 하겠는가’ 싶어 일단 만나기로 결정하고 청와대로 들어가 대통령을 독대했다.

하지만 가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정치 입문을 권하는 자리일 터였다. 기업 경영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정치 쪽은 문외한이기에 자신이 없었다. 경영에 지장이 있을까 걱정도 됐다

나를 맞은 김 대통령은 조용한 어조로 “나를 도와 달라”고 했다. 나는 “제가 무능한데 어떻게 도와드리겠느냐. 국가에 봉사하는 거라면 사업을 통해 국가에 봉사하겠다”고 극구 사양했다. 그러자 김 대통령은 “내가 자신감 있게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다. 짧은 만남이었고,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1970년대 산업 발전 시기에 회사를 경영한 나는 한국이 잘살려면 경제를 발전시켜야 하고, 또 경제가 잘되려면 좋은 정치가 실현돼야 한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 왔다. 하지만 내가 직접 정치를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결국 ‘몇 년 동안 여성경제인을 위해 일했는데 이제 범위를 넓혀서 일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나는 지금껏 걸어왔던 길과 전혀 다른 새로운 길에 섰다. 이만섭 대표와 공동으로 1999년 9월 국민회의 신당추진위원회 공동대표가 되면서 나는 공식적으로 정치인 장영신으로 변신했다.

초보 정치인으로 정치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던 이듬해 초,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준비로 정치권이 무척이나 분주했다. 당 안팎에서는 내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등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당에서는 나에게 지역구 출마를 권유했다. 당시 공동대표였던 이만섭 대표가 전국구 1번이었기에 나 역시 2번 정도에서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할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지역구 출신 여성의원이 거의 없었다. 지역구 출마를 권유받은 나는 ‘당선되면 정치를 밑바닥부터 제대로 배울 수 있고, 낙선하면 정치를 그만두면 되겠다’는 생각에 출마를 결심했다.

내가 출마한 지역구는 구로구였다. 나에게 구로는 추억과 사연이 있는 장소다. 남편이 구로(당시 영등포)에서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내가 경영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기까지 구로를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구로는 나의 제2의 고향과도 같다. 과거 대기업이 시내 중심가로 사옥을 지어 나갈 때 애경의 임원들도 본사 건물을 시내로 옮기자고 수차례 건의했지만, 내 생각은 변함없었다. 나의 청춘과 정열, 공로가 녹아 있어 고향보다 진한 애정이 있는 구로를 내 생전에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런 개인적인 인연 때문에 서울에서 가장 낙후되고 재정 여건도 열악한 곳 중 하나인 구로를 쾌적하고 살기 좋은 지역으로 만드는 데 미력한 힘이라도 보태고 싶다는 애정이 있었다.

그런 구로구가 최근에는 많이 변했다.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영세공장으로 가득했던 구로공단이 최첨단 벤처전문단지와 패션디자인단지, 지식산업단지 등으로 변신하는 것을 보면 내가 처음 봤던 구로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뤘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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