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기업도시를 가다]<7>네덜란드 에인트호번

  • 입력 2008년 11월 12일 02시 56분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의 ‘하이테크캠퍼스 에인트호번(HTCE)’ 내 필립스 연구개발(R&D) 센터의 연구원들이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콘퍼런스 센터로 이동하고 있다. TCE에는 필립스 직원 3000명을 포함해 모두 6600여 명이 일하고 있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축구 클럽 ‘PSV 에인트호번’의 홈구장인 필립스 스타디움. 에인트호번=김창덕 기자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의 ‘하이테크캠퍼스 에인트호번(HTCE)’ 내 필립스 연구개발(R&D) 센터의 연구원들이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콘퍼런스 센터로 이동하고 있다. TCE에는 필립스 직원 3000명을 포함해 모두 6600여 명이 일하고 있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축구 클럽 ‘PSV 에인트호번’의 홈구장인 필립스 스타디움. 에인트호번=김창덕 기자
‘빛의 도시서 지식기반 도시로’ 에인트호번

필립스와 118년 공생… 유럽 최대 R&D도시 탈바꿈

《‘빛의 도시’ 에인트호번. 한국에서는 박지성, 이영표 선수와 거스 히딩크 감독이 활약하던 명문 축구클럽 ‘PSV 에인트호번’의 연고지로도 잘 알려진 도시다.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동남쪽으로 130여 km 떨어져 있는 에인트호번은 인구 5000명도 채 안 되는 한적한 마을이었지만 1891년 필립스가 둥지를 틀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조명산업의 대명사인 필립스 때문에 도시의 애칭도 자연스럽게 ‘빛’이 됐다.》

필립스 R&D센터 짓고 나노 - 자동화 - 의료 등 집중 육성

“정책 결정 최우선 기준은 필립스”… 市도 2억유로 지원

50개국 75개기업 유치… 네덜란드 GDP의 14% 벌어들여

네덜란드 5대 산업도시로 성장한 에인트호번은 21세기 들어서는 자동화기술, 나노테크놀로지, 의료 등 첨단기술 연구개발(R&D) 중심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118년간 공생(共生)해온 에인트호번과 필립스의 흥미로운 도전은 유럽뿐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 오늘의 에인트호번을 만든 필립스

1891년 에인트호번에 공장을 세운 필립스는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타지 사람들을 끌어들여야 했다. 워낙 낙후된 곳이라 회사는 근로자들을 위한 집을 짓고 문화사업과 교육, 의료시설 등을 적극 지원했다. 이는 고스란히 에인트호번의 자산으로 남았다.

에인트호번 시청의 크리스 드 프린스 외국인투자 및 국제 업무 매니저는 “초기 에인트호번 정착민들은 필립스로부터 땅을 사고 필립스가 지은 집을 구했다”며 “지금도 에인트호번 사람들은 필립스의 전구를 쓰고 필립스 면도기, 필립스 TV로 생활한다”고 말했다.

에인트호번과 필립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PSV 에인트호번도 1913년 필립스의 공장 근로자들이 결성한 사내(社內) 클럽이 원조. 이미 100년 가까이 시민들과 호흡해온 이 클럽의 홈구장 이름은 ‘필립스 스타디움’이다. 필립스 뮤지컬 공연장, 필립스 교향악단, 필립스 마라톤 등 지역사회 곳곳에서 필립스와의 연결고리는 쉽게 발견된다.

필립스와 에인트호번을 얘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첨단기술 집적단지인 ‘하이테크캠퍼스 에인트호번(HTCE)’이다.

이곳엔 현재 50개 나라의 75개 기업이 입주해 있다. 미국 IBM, 일본 NEC전자 등 글로벌 기업 8개와 15개의 R&D그룹, 5개 국책연구원, 30여개 신생 벤처기업 등이 HTCE 가족들이다. HTCE 측은 입주 기업을 100개까지 늘려 현재 6600여 명(필립스 3000여 명)인 연구원을 1만 명 이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 ‘디지털 생태계’의 현장, HTCE

지난달 중순 에인트호번 시내에서 차로 10분 남짓 달려 찾은 HTCE에서는 대학 캠퍼스에 온 듯한 자유분방함과 치열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낮 12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도 콘퍼런스 센터 대강의실은 세미나가 한창이었다. 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의실이 9개나 되는 이 센터의 세미나 일정은 연말까지 꽉 차 있었다. 강의실 밖에서도 한 손에는 와인이나 음료수, 다른 한 손에는 펜을 쥔 채 열띤 토론을 벌이는 연구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HTCE는 1963년 필립스가 넓은 밀밭에 R&D센터로 사용할 건물 두 동(棟)을 지으면서 태동했다. 자유로운 정보 공유를 전제로 하는 ‘디지털 생태계’의 중요성을 인식한 필립스는 2003년부터 다른 기업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모든 정책 결정의 최우선에 필립스를 둔다’는 에인트호번 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103만 m² 크기의 HTCE 조성에 2억 유로(약 3380억 원)를 투자했다. 필립스 소유의 땅이지만 HTCE 운영과 외부 기업 유치 등 행정·지원 업무는 모두 지역개발공사가 맡고 있다. 기업은 기업 활동에만 전념하도록 한 에인트호번의 배려다.

HTCE 홍보담당자인 벨트 얀 볼트만 씨는 “이곳에 입주한 회사의 연구원들은 언제든지, 어느 누구와도 정보를 교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에인트호번과 필립스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05년에는 신생 연구기관이나 기업을 지원하는 ‘TeLRE’라는 펀드를 만들었다. 올해까지 4년간 300만 유로(약 51억 원) 규모로 시범 운영된 이 펀드는 내년부터 크게 확대될 예정이다.

에인트호번에 해외 기업과 고급 인력이 모여드는 배경에는 뛰어난 거주 요건도 한몫한다. 35개국 출신 어린이(4∼12세) 500여 명이 공부하고 있는 RIS(1965년 설립)와 청소년(11∼19세) 260여 명을 교육하는 ISSE(1974년 설립)는 유럽에서도 가장 훌륭한 국제학교로 꼽힌다.

○ 지식기반형 기업도시의 모델

에인트호번 시와 21개 위성도시를 포함한 ‘에인트호번 지역(region)’의 인구는 지난해 1월 기준 72만8000여 명으로 네덜란드 전체의 4.5% 정도이지만 이곳의 지역내총생산(GRDP)은 네덜란드 국내총생산(GDP)의 14.5%나 된다.

필립스뿐 아니라 ASML(반도체 웨이퍼), NXP(반도체), FEI(전자현미경) 등 필립스로부터 독립한 자(子)회사들의 성장과 함께 인구도 꾸준히 늘고 있다. 1995년 이후 지난해까지 에인트호번 지역 인구 증가율은 7.63%. 같은 기간 네덜란드 평균은 6.05%다.

에인트호번 지역에서 이뤄지는 연간 R&D 투자액은 네덜란드 전체의 43%에 이른다. 필립스만 해도 1998∼2007년 10년간 HTCE에 6억 유로(약 1조140억 원)를 투자했다.

이에 따라 에인트호번 지역은 전체 35만5000여 개의 일자리 중 7만여 개가 첨단기술 산업과 관련된 것일 정도로 유럽은 물론 세계적으로 대표적인 ‘지식기반형 기업도시’의 성공사례로 꼽힌다.

에인트호번=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에인트호번은 브레인포트”

지역정부-기업-교육기관 협력 첨단기술 도시로

네덜란드 정부도 2013년까지 2조9000억원 투입

네덜란드는 2004년 에인트호번 지역을 ‘브레인포트(Brain Port)’로 지정해 2013년까지 이곳을 유럽 최대 첨단기술 중심으로 키우기 위한 야심 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005년부터 2013년까지 9년간 최소 17억5000만 유로(약 2조9575억 원)가 투입되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브레인포트 계획의 원동력은 지역정부와 필립스를 포함한 기업들, 교육기관인 에인트호번 공대(TU/e) 간의 밀접한 협력관계에서 나온다. 이들의 관계는 DNA의 이중나선 구조인 ‘더블 헬릭스(Double Helix)’를 인용해 ‘트리플 헬릭스(Triple Helix)’로 불린다.

시 정부는 트리플 헬릭스를 이룬 3자 간 교류를 적극 돕기 위해 별도의 사무실을 마련하고 15명의 전담 인력까지 배치했다.

특히 1956년 설립된 TU/e의 역할에 거는 기대가 크다. 매년 7000명 이상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TU/e의 박사후연구원 수는 2002년 520여 명에서 2006년 640여 명으로 늘어났다.

‘하이테크캠퍼스 에인트호번(HTCE)’에 입주한 기업들 상당수는 TU/e와 산학(産學)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고, 50명 이상의 기업인이 이곳에서 단기 강의를 맡고 있기도 하다.

브레인포트의 핵심 요소는 △사람 △기술 △비즈니스 △환경 등 4가지다. 우수한 교육환경에서 양성된 인재들이 첨단 지식산업에 종사하고, 여기서 개발된 혁신기술은 곧바로 사업화해 이윤과 함께 또 다른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선(善)순환 구조다.

에인트호번 시청의 크리스 드 프린스 외국인투자 및 국제업무 매니저는 “브레인포트 계획의 성공 여부는 각각의 요소를 얼마나 균형 있게 발전시킬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며 “네덜란드의 미래 또한 여기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에인트호번=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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