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민 칼럼]정신은 마르고 문화는 쇠퇴하고

  • 입력 2006년 10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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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에는 인간 생활의 질을 크게 향상시키거나 혹은 시대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꿔 놓은 발명품들이 있다. 예를 들어 증기기관과 내연기관은 인류에게 산업화의 길을 열어 준 획기적 발명품들이다. 요즘의 디지털 세상이 펼쳐진 것은 194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반도체 소자들 덕분이다. 이처럼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기록된 수많은 발명품 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꼽으라면 그것은 무엇일까.

발명품에도 명예의 전당이 있다면 제일 높은 자리에는 아마도 ‘책’이 올라 칭송을 받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책이야말로 선인들의 지식과 지혜를 축적하고 전수하는 수단으로, 오늘의 문명을 이룩하게 한 가장 큰 공로자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위대한 사상과 중요한 지식은 책이라는 발명품 속에 기록되고 보존되어 왔다. 성경 등 대부분의 종교 경전과 세계 각국의 헌법들은 대개 책으로 반포되었고 공자의 사상과 뉴턴의 이론도 책으로 전해져 왔다. 찰스 디킨스의 흥미진진한 소설과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음악도 책이 있어 즐길 수 있었다.

이처럼 예로부터 문명인은 책과 함께 살아왔고 그것을 소중히 여겨 왔다. 고대 아시리아에 존재했던 장서 1만 권의 도서관부터 1000만 권이 넘는 미 국회 도서관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국가들은 도서관에 정성을 들였다. 선남선녀에게 청아한 즐거움을 주고 사회적으로 정신문화의 중추 역할을 해 온 책의 소중함, 그 역할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출판사와 서점들은 시민과 정부의 따뜻한 사랑과 열렬한 지원으로 크게 번창해야 할 업종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한국의 전자산업이나 자동차산업은 외국과 어깨를 겨루며 경쟁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세계적 규모의 출판사는 없다. 선진국에 비해 빈약한 우리나라 서점의 서가는 그나마 어린이 도서나 입시준비용 참고서가 아니면 ‘생각을 바꾸면 돈이 보인다’와 같은 저급한 제목의 책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런 판에 고금의 위대한 양서나 학계의 가치 있는 전문 서적을 출간하려는 출판사들이 살아남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출판 분야뿐 아니라 고급문화 전반이 영양실조로 쇠약해 가고, 정신적 삶에 영양을 주는 인문학이 빈사의 비명을 지르고 있는 후진적 현상은 날로 심화되고 있다.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시위를 마친 후 고급 외제 차를 타고 돌아가는 화려한 대중 스타들과 비교할 때 지성적 직종에 종사하는 출판업자들의 삶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대통령이 출연하는 TV 토론프로에도 영화 ‘왕의 남자’의 주인공은 초대됐지만 출판계 인사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이렇게 된 것은 천박해진 세태 탓이기도 하지만 철학이 부족한 정치인들에게도 적잖은 책임이 있다. 집권 지상주의에 빠져 오로지 선거에서의 승리에만 몰두하는 정치인들에게 ‘표’는 국가적으로 가치 있는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그래서 ‘표’와 직접 관계없는 고급문화는 홀대받고 ‘인기’와 밀접한 대중문화는 후대받는 것이 당연시됐다.

나라경제가 궁핍할 때조차 외채를 끌어들여서까지 대영박물관과 런던교향악단 같은 고급문화 발전에 애를 쓰던 영국과 대중오락이 판치는 대한민국의 차이는 무엇일까. 앙드레 말로와 같은 세계적인 작가에게 문화부 장관을 맡기는 나라와 유명 영화감독에게 문화부 장관을 시키는 나라에는 훗날 어떤 차이가 생길까. 대중문화는 범람하고 있지만 고급문화는 쇠퇴하고, 영화관은 열면 대박이지만 서점들은 지쳐 문을 닫는 나라, 우리나라 사람보다 책 안 읽는 국민은 아마도 아프리카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탄식이 과장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물론 살아가는 데는 대중문화도 중요하다. 지구상에 오락이 없고 공자님 맹자님만 수십억 꽉 차 있다면 얼마나 숨이 막힐까. 차라리 연예인 수십억과 함께 사는 게 재미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문화는 어디까지나 사회의 양념 같은 존재다. 음식에 양념도 필요하지만 우리 사회는 본질이 거의 없는 싸구려 양념범벅이 되어 가는 꼴이다. 근본이 충실한 나라가 되려면 사회가 개그쇼에만 심취할 것이 아니라 정신적 ‘업그레이드’에도 눈을 돌려야 할 것이며 집권세력도 저급 투쟁에만 몰두하지 말고 고급문화 중흥에도 힘을 써야 할 것이다. 비록 자신들의 코드에는 맞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규민 大記者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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