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세이/장원재]지도자가 오판하면…

  • 입력 2004년 10월 4일 18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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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멕시코 월드컵 준준결승 잉글랜드 대 서독전. 2 대 0으로 잉글랜드가 앞서고 있을 때였다. 승리를 확신한 잉글랜드의 램지 감독은 다음 경기에 대비하기 위해 후반 30분이 남은 상황에서 공격의 핵 보비 찰턴을 수비수와 교체했다.

잉글랜드는 그때까지 65년간 서독에 단 한번도 패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짐작이나 했으랴. 이것이 ‘사상 최대의 작전미스’의 서막일 줄을. 찰턴의 전담 마크맨으로 뛰던 한 젊은 선수의 족쇄가 풀린 것이다. 그는 1골 1어시스트로 잉글랜드 문전을 초토화한다. 결과는 연장전에서 결승점을 올린 서독의 3 대 2 역전승. 그 영웅의 이름이 베켄바우어다.

램지는 1966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를 처음으로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올린 감독이다. 잉글랜드는 물론 우승 자격을 충분히 갖춘 팀이었다. 그러나 그때도 ‘옥에 티’가 있었다. 1 대 0으로 신승(辛勝)한 대아르헨티나전 직후 기자회견에서 경기 부진의 이유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램지는 “우리는 짐승들과 경기를 할 때는 실력 발휘를 할 수가 없다”고 비외교적으로 답변해 물의를 일으켰다. 준결승 대포르투갈전(2 대 1승)에서는 미묘한 판정 논란이 있었다. 결승전 대서독전(4 대 2승)에선 연장 10분 허스트가 쏜, 크로스바를 맞고 떨어져 들어간 ‘골’이 골라인을 확실하게 넘지 않았다는 시비가 일어 램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다음 대회에선 완전무결한 우승을 차지해야 했다. 1970년 잉글랜드 대표팀은 ‘사상 최강의 팀’이라는 찬사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4강 길목에서 좌초했다. 사실은 훨씬 전부터 몇 줄기 암울한 징조가 보였다. 첫 번째는 남미인들의 복수. 잉글랜드팀이 준비캠프를 차렸던 콜롬비아에서 한 보석상이 팀 주장 보비 무어를 절도 혐의로 고발했다. 평소 인품이나 수입으로 보아 무어가 절도를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지만, 콜롬비아 경찰은 법의 이름으로 이 위대한 수비수를 1주일 이상 억류했다. 그들은 짐승 운운한 램지의 발언을 남미인 전체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두 번째는 주전 골키퍼 골든 뱅크스의 배탈과 결장. 세계 최고의 수문장으로 불리던 그가 훈련 뒤 들이킨 맥주 한 잔에 급성 복통을 일으키며 쓰러진 것. 예측불허의 비상사태였다.

훌륭한 지도자라면 어떤 경우가 닥치더라도 나름대로의 대비책을 갖고 있어야 하는 법. 뛰어난 지도자는 그냥 태어나는 게 아니다. 남북한이 대치하는 한반도 상황과 마찬가지로 축구에도 상대가 있다. 우리가 먼저 호의를 보인다고 상대방도 호의로 보답한다는 보장이 없다. 우리가 팀의 기둥을 교체한다고 해서 상대방도 팀의 주축 선수를 벤치로 불러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램지는 위대한 지도자였지만 1970년 월드컵에서는 거듭된 오판으로 팀을 망쳤다. 한번 종료 휘슬이 울리면 어느 누구도 경기 결과를 뒤집을 수 없다. 잉글랜드는 그때 이후로 서독에 연전연패를 기록하며 징크스에 시달린다. 2000년 유럽선수권대회에서 1 대 0으로 승리할 때까지, 무려 30년 동안 그들은 단 한번도 독일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감독과 지도자의 판단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장원재 숭실대 교수·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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