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69>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0월 1일 18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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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내 지난날 패왕의 군중에서 장군을 만난 듯도 하오만 그때는 알아 뵙지 못했구려. 한왕께서는 어디 계시오?”

서위왕(西魏王) 위표(魏豹)의 그 같은 물음에는 알 수 없는 위엄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한신도 지지 않겠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싸움터에서는 위로 하늘에 견주는 이도 아래로 못[연]에 이르는 이도 모두 장수의 명을 따라야 한다 했소이다. 그런데 우리 대왕은 왜 찾으시오?”

“이제 한나라의 대장군이 되셨으니 군진(軍陣)의 일은 마땅히 장군과 논의해야 할 것이오. 그러나 한왕께서 몸소 이곳까지 납시었다니 아무래도 한왕부터 먼저 뵈어야 될 듯싶소.”

그 같은 위표의 말에 한왕이 수레에서 일어나 윗몸을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서위왕은 그간 무양(無恙)하시었소? 그런데 이제 창칼이 서로 부딪치게 된 마당에 과인을 찾는 까닭이 무엇이오?”

그러자 위표는 먼저 말 위에서 깊숙이 고개를 수그린 뒤 공손히 말했다.

“저는 대왕께서 하동으로 드셨다는 말을 듣고 서위(西魏)를 들어 바치고자 우리 장상(將相)들과 더불어 마중을 나왔습니다. 하지만 한때나마 대왕처럼 저도 왕호(王號)를 쓰며 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더구나 항적(項籍=항우)이 제멋대로 주무르기는 해도 왕호를 내리고 땅을 나누어 주신 분은 의제(義帝)이셨으니 어찌 그것을 가볍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이에 아무에게나 함부로 내던지지 못하고 대왕을 찾았던 것입니다. 이제 격식을 갖춰 이 땅과 왕홀(王笏)을 대왕께 바치고자 하오니 물리치지 마시고 거두어 주옵소서.”

말뿐만이 아니었다. 위표는 곧 좌우에게 명을 하여 모든 깃발을 뉘고 병장기를 땅바닥에 내려놓게 했다. 그리고 자신도 말 위에서 내려 보검을 풀고 갑옷투구를 벗은 뒤 홀로 한왕의 수레 앞으로 걸어와 엎드렸다.

한왕은 그렇게 시세에 밝고도 예모 반듯한 위표에게 흠뻑 반했다. 그를 다시 위왕(魏王)으로 봉하고 옛 위나라 땅을 모두 돌려주었다. 또 한왕(韓王) 신(信)처럼 제 군대를 따로 이끌고 언제나 가까이서 자신을 따르게 했다.

위표를 따라 평양성으로 들어간 한왕은 크게 잔치를 벌여 장졸을 위로하고 자신도 장수들과 함께 마셨다. 술이 취하자 위표가 싸움 한번 없이 항복해 온 것이 모두 자신이 잘나 그리된 양 허세를 부리더니 다음 날은 술이 깨기도 전에 장수들을 불러 큰소리치듯 말했다.

“이제는 하내(河內)를 거둘 차례요. 은왕(殷王) 사마앙(司馬昻)에게도 글을 보내 항복을 권하시오.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대군을 보내 옥과 돌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태워버릴 것이라고 하시오!”

그러자 장량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은(殷)나라는 작고 그 왕 사마앙의 군사는 많지 않으나 서위왕 위표와는 경우가 다릅니다. 또 신(臣)이 알기로 대왕께서는 이미 한번 은왕 사마앙을 실망케 하신 터라 이제 말이나 글로는 결코 그의 항복을 받아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또 무슨 소리요? 내가 언제 은왕을 실망케 했단 말이오?”

한왕이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때 그 자리에 섞여 있던 위표가 나서서 말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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