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상]국양/국가연구과제 선정 너무 서두른다

  • 입력 2004년 7월 9일 18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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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년도 훨씬 지난 이야기다. 박사학위를 받고 바로 미국 벨연구소에 취직한 다음 해 어느 날 과장이 회의에 들어가라고 해서 영문도 모른 채 들어갔다. 노벨상 수상자 1명과 유명한 학자 7, 8명 사이에 끼어 얘기를 듣던 나에게 갑자기 질문이 떨어졌다.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유사하다는 이유로, 새로운 형태의 디스플레이 장치를 연구개발해야 하는지를 서른을 갓 넘긴 신참에게 묻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반대 의견을 냈고 회의 결과 그 장치의 연구개발은 하지 않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노무현 정부는 소득 2만달러 시대를 앞당기기 위해 10대 성장동력산업 위주의 연구개발을 추진한다고 한다. 미국 정부의 2004년 연구개발 예산이 약 140조원이며 다국적 제약회사인 화이자의 연간 연구개발비가 9조원, 미국 IBM사의 연간 연구개발비가 6조원이다. 우리나라의 정부지원 연구개발 예산이 약 5조원에 불과한 현실을 감안할 때 우리 현실에 맞는 정책이라고 생각된다. 점점 둔화되고 있는 우리 주요 산업의 기술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연구개발 분야를 선정하고 이에 집중 투자하는 방법은 경제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다.

한국 정부는 10년 전부터 G7사업, 정보기술(IT)을 위시한 6T 위주의 연구개발 사업, 국가기술지도에 따른 연구개발 사업을 순차적으로 추진해 왔다. 이들 사업이 모두 성공했다면 우리는 이미 G7 국가여야 하며 2만달러 소득도 이미 달성했을 것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연구개발 정책 과제가 너무 서둘러 결정되고 있지 않나 생각할 때가 많다. 주무 부처에서 기본안을 제안하면 과학기술정책 연구기관에서 전문가들을 소집해 위원회를 구성한다. 위원회에는 전공별로 산학연의 여러 전문가를 포함시킨다. 대부분의 위원회는 우리의 미래를 위한 연구개발 분야를 한두 달 안에 결정한다. 그러나 선진국들과 달리 각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가 없는 상황에서 ‘일반적 전문가’들이 이처럼 서둘러 결정하는 것은 옳지 않거나 미흡할 수도 있다. 연구개발 분야가 결정되면 주무 부처는 서둘러 세부 연구개발을 기획하고, 예산을 신청하며, 장기 계획을 마련하게 된다. 그러나 과거 국책사업에서 그러하였듯이 이런 기획작업에 대한 평가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몇 년 전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 학자가 한국의 연구개발 정책을 보고 나서 해 줬던 충고가 생각난다. 그는 연구개발을 석유 시추에 비유하며 10개의 유공을 뚫을 돈밖에 없는 작은 회사가 100개의 유공을 뚫을 능력이 있는 큰 회사를 흉내내 어설프게 100개의 유공을 뚫으면 절대 시추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작은 회사는 시추공 선정에 더욱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얘기다.

국가 연구개발 사업 성패의 절반은 기획단계에 달려 있다. 판단할 수 있는 전문가가 없으면 외국인을 영입하고 각 세부 전공의 세계적 전문가를 국내에서 육성하며, 기획 결과를 몇 차례 재검증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에서 도입하고 있는 제도, 즉 국내외의 세계적인 학자에게 기획 전반을 맡겨 그의 이름을 걸고 사업을 추진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국양 서울대 교수·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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