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이문구, '씨도리 배추'

  • 입력 2004년 1월 15일 18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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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모르시겠지요.

겉대나 속대나 싸잡아서

배추통만 싹둑 도려내어

겨우 밑동만 남은

씨도리 배추,

두었다가 씨앗을 받으려고

내버려 둔

배추꼬랑이예요.

내가 겨우내 꽁꽁 언 채

눈으로 목을 축이며

밭에서 견디는 것은

내년 봄에

노랑 물감 같은

장다리꽃을 피우기 위해서지요.

왜라니요,

꽃을 피우지 못하면

살았다고 할 것이 없잖아요.

- 시집 ‘산에는 산새 물에는 물새’(창비) 중에서

동장군 내뿜는 얼음 장풍에 저수지 꽁꽁 얼어도 물고기 숨 쉴 손바닥 숨구멍 하나 찰랑거리는 것 알죠. 온 들판 백 가지 풋것들 다 얼어 죽은 듯해도 겨우내 제비꽃 씨앗 하나 건들지 못하는 것 알죠. 누런 풀잎 둥글게 엮어 한뎃잠 자는 벌레알 하나 얼리지 못하는 것 알고말고요.

주역(周易)에서 한겨울을 나타내는 괘에는 다섯 개의 얼음장 음효 밑에 단 한 개의 성냥골 양효가 숨어 있다죠? 고것 하나가 살아남아 새로운 봄과 불타는 염천(炎天)을 지핀다죠?

당신을 모를 리 있겠어요. 겉대 속대 할 것 없이 고갱이 다 내어주고 시린 발로 언 들판 건너고 계신 당신을요. 열두 자식 키운 쭈그렁젖 어무이요, 올봄에도 노란 장다리꽃이야 피고말고요.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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