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468…귀향 (2)

  • 입력 2003년 11월 14일 18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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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한시도 작은할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신문에서는 부산경찰서 폭탄 사건, 밀양경찰서 폭탄 사건, 조선총독부 폭탄 사건, 상하이 황포탄 사건, 도쿄 니주바시 폭탄 사건, 베이징 스파이 암살사건, 경북 의열단 사건, 식은(殖銀)·동척(東拓) 습격 사건은 모두 상하이 의열단의 소행이라고 떠들어댔습니다. 그리고 작은할아버지 윤세주는 김원봉의 오른팔, 의열단의 넘버투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1920년 6월,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윤세주는 조선총독부 폭파 계획의 주모자로 붙잡혔습니다. 그로부터 7년 동안의 옥고를 치르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함께 옥고를 치렀던 김원봉의 친척 황상규와 신간회를 결성하여 지하 활동을 펼친 탓에, 작은할아버지의 얼굴은 내 기억에 없습니다.

1932년에 황상규가 죽자 윤세주는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에서 김원봉과 재회했습니다.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고 또 3년 후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의 간부가 되었으며, 1938년에는 우한으로 거점을 옮겨 조선의용대를 조직했습니다. 대장은 물론 김원봉이었습니다. 난징에 이어 우한이 함락되자, 구이린, 충칭으로 이동합니다. 우리가 풍문으로나마 들었던 소식은 거기에서 끊깁니다.

밀양에 남은 우리들의 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윤세주는 사형제의 막내입니다. 우리 할배는 윤세주의 제일 큰형인데, 세 형들은 직업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금지돼 있었던 것이죠. 요주의 인물로 항상 미행이 따라 붙었고, 한참 밥을 먹는데 경찰이 문을 걷어차고 저벅저벅 들어와 집안을 온통 헤집고 돌아가는 일도 허다했습니다. 우리들은 굶주림과 싸웠습니다. 매일 말린 무청으로 죽을 끓여 먹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나마 뜻있는 분들의 보이지 않는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이었습니다. 내일 일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오늘은 그럭저럭 살아남았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하지만 나는 우리 할배나 작은할아버지들, 어머니 아버지에게서 윤세주를 원망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디에 눈이 있고 귀가 있는지 알 수 없어 함부로 그 이름을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왜놈들이 그 이름을 뱉으면 가족들 모두의 눈이 불타올랐습니다. 나 역시 그랬겠죠.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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