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들여다보기]정신건강 해치는 '인스턴트 프로'는 그만

  • 입력 2003년 9월 29일 17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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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푸드’ 한국 방송, 이제는 식단을 바꾸자

한국 방송은 패스트푸드(Fast- food) 방송이다. 콩을 몇 달 동안 발효시킨 메주로 만든 된장과 간장 같은 방송, 배추를 소금에 절여내 고춧가루를 버무려 겨우내 숙성시켜 먹는 김장김치 같은 방송이 아니다. 바쁜 현대인을 위한답시고 얼린 음식 재료를 튀기고, 조미료를 첨가해 만든 패스트푸드 같은 방송이라는 뜻이다.

요즘 방송에는 숙성되지 못한 프로그램이 난무한다. MBC의 ‘추석특집 땐스땐스’는 추석 휴일 아침시간의 거실을 ‘클럽 M’이라는 성인용 나이트클럽으로 바꿔버렸다. 담당 국장도 솔직하게 준비시간의 부족에 따른 졸속 제작이었음을 털어놓았다. 이는 대표적인 숙성 부족의 사례일 것이다. 숙성이 부족하니, 당연히 조미료의 첨가는 늘어나기 마련이다. 시청자들의 시선을 뺏기 위해 현란한 자막의 사용과 음향효과를 넣고, ‘숙련된’ 박수부대를 동원한다. 심지어는 출연자들을 가학해 억지 볼거리를 만들어 낸다.

국내 방송 제작진은 몇 년 동안 창의적인 기획과 사전제작으로 ‘숙성된’ 프로그램을 만들기보다는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서로 베낀 뒤 자극적인 눈요깃거리를 조미료처럼 첨가한 ‘인스턴트’ 프로그램을 만들어낸다. 시청자들도 이런 프로그램에 익숙해져서 매순간 눈요깃거리가 없어지면 채널을 돌려버린다. 리모컨은 이런 시청자들의 충실한 반려자이다.

KBS2 ‘슈퍼TV 일요일은 즐거워’는 연예인들을 물에 빠뜨리고, 심지어 혐오식품을 먹이기도 한다. 해병대 신병훈련소를 연상케 하는 지옥훈련도 강요한다. SBS ‘뷰티풀 선데이’도 연예인들을 가학하는 내용으로 가득해 이미 ‘아름답지 못한 일요일’로 전락한지 오래다. MBC의 ‘강호동의 천생연분’도 출연진에 대한 육체적, 언어적 폭력이 도를 넘어 시청자들의 미간을 찌푸리게 한다. 시청 후 감동은커녕 찜찜한 조미료의 뒷맛만 남는다.

이제는 패스트푸드 프로그램을 국내 방송 ‘식단’에서 몰아내야 한다. 프로그램에 담겨 있는 숙성된 맛, 가미되지 않은 원래의 맛을 제대로 보고 싶다.

최근 2주에 걸쳐 방송된 ‘MBC 스페셜-가족’의 ‘1부:어머니와 딸’, ‘2부:아버지와 아들’은 우리에게 된장과 김치의 숙성된 맛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과장된 성우의 목소리도, 화면 아래를 채우는 자막의 공해도, 특별한 효과 연출도 없었다. 단순히 인터뷰한 사람들의 목소리만 진솔하게 편집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프로그램에는 제작진의 오랜 노력이 묻어났다. 패스트푸드 식단에 몇 안 되는 슬로푸드(Slow-food)였기 때문이다.

슬로푸드 방송을 만들려면, 숙성의 시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방송은 무엇인가 빠르게 만들려는 속성을 갖고 있다. 2∼3주 만에 만들어내는 프로그램들이 판을 치니, 숙성해서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려는 제작자들의 설 땅이 없어지는 것이다. 조금은 느리고 조금은 여백이 있어 오히려 세상과 인생을 생각게 하는 슬로푸드 방송을 기다린다.

이창현교수 chlee@kookmi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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