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진덕규/民族은 수단이 아니다

  • 입력 2003년 8월 21일 18시 30분


코멘트
민족이라는 말처럼 모호한 개념도 흔치 않다. 그러면서도 그것의 정치적 효용도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어떤 사람이라도 민족을 말하면 일약 지도자로, 애국자로 둔갑할 수 있다. 무슨 대회라도 열리면 의당 민족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민족의 이름으로 온갖 비난을 쏟아붓기도 한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이제 어느 한편에서 사용하는 민족이 따로 있는 것 같다.

▼민족 왜곡 전쟁-독재로 나타나 ▼

어느 정치가는 “어떤 우방이나 이념도 민족을 넘어설 수 없다”고 단언한 적이 있다. 정말 그럴까? 그처럼 민족은 절대적일까? 물론 민족은 중요하다. 민족의 하나됨과 발전은 한층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 하나됨도 같은 피와 역사와 언어를 가진 사람끼리만의 결속을 의미하는 수가 많다. 자기 민족과 다른 집단은 배척의 대상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나와 남을 구분하는 차별의식이 민족감정의 밑바탕에 깔리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민족일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민족의 왜곡이다. 다른 민족과 공존과 발전을 모색하는 것이 성숙된 민족의 자세다. 민족 사이의 다름은 차등이 아니라 차이일 뿐이며, 배척이 아니라 받아들임이어야 한다. 다른 민족과의 공존으로 모두가 하나로 나아가기 위한 첫 출발을 같은 피와 언어와 역사를 가진 특정 민족에서 시작할 뿐이다. 같은 민족에서 출발해 다른 민족과 손을 잡고 평화를 향해 전진하는 것이야말로 민족의 존재론적 의미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는 이와 다른 사실을 보여준다. 지난 반세기 동안 저질러진 일들, 그것도 민족의 이름으로 자행된 참화들을 쉽사리 기억할 수 있다. 민족을 분열로 몰고 갔고, 전쟁으로 치달으며 이를 민족해방전쟁이라고 강변했던 일이 떠오른다. 민족의 명분을 빌려 개인우상화로 나아간 독재자도 있었다. 심지어 민족을 ‘부르주아 개념’이라며 배격했던,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만이 전부라고 주장했던 논리도 기억에서 지울 수 없다. 그런 논리의 연장선에서 민족을 ‘수단’으로만 활용하다보니 개념의 혼돈과 왜곡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민족을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 같은 민족에게 예사로 총격전을 자행하면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하는 반민족적 작태를 되풀이하면서 민족을 주창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처럼 한낱 변명의 명분이 되고 만 민족 개념은 분열을 조장하고 심화시키는 근원이 될 뿐이다. 그렇게 활용되고 있는 민족 개념은 가장 반민족적인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민족의 참뜻은 연대와 통합을 위한 ‘우리 의식’이다. 결과적으로는 정의로움에 바탕을 둔 인간화의 실현일 수 있다. 이른바 민족의 제1원칙이 ‘우리 의식의 발현’이라면 그것에 근거한 제2원칙은 ‘국민국가의 완성’이다. 국민국가의 지향은 국민 모두가 주인인 나라, 즉 민주주의의 확립에서 얻을 수 있다. 이 점에서 민족은 민주주의의 바탕이다. 이를 통해 정의로움과 ‘평화를 확립하는 것’은 민족의 제3원칙이다.

▼‘연대와 통합’이 민족의 참뜻 ▼

‘우리 의식’의 하나됨에서 벗어나는 분열 획책의 언동은 그 어떤 것도 민족과는 무관한 것이 된다. 민족은 민주주의에서만 번성할 수 있기 때문에 독재는 반민족일 수밖에 없다. 민족은 정의로움과 평화이기에, 전쟁은 민족을 파괴하는 원인이 된다. 이를 전제로 오늘의 현실을 바라볼 때 민족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일들의 대부분은 민족분열적이고 어느 한편만의 주장임을 알게 된다. 진실된 의미에서 민족의 길은 편가르기를 끝내는 것, 다른 나라를 원수로 설정해서 공격하는 행동을 그만두는 것,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만이 닫힘에서 열림의 민족으로 나아갈 수 있고, 자존자대(自尊自大)의 쇼비니즘과 구분되는 성찰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참 민족을 추구하는 세력과 민족을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세력 사이에 한판 대결이 벌어지는, 그럼으로써 민족적 비극을 되풀이할 것만 같은, 암담했던 과거로 퇴행하는 것 같다. 이것의 극복은 참 민족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며, 그것은 열림과 연대로 화평을 이룩하는 것임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진덕규 객원논설위원·이화여대 교수 dkjin@ewha.ac.k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