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하기 힘든 나라]<3>제대로 된 기업교육이 없다

  • 입력 2003년 8월 19일 18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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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경제연구소는 올 2월 중고교생 1275명을 대상으로 경제의식을 조사했다. 결과는 놀랍다.

△질문1=기업이 해야 할 일의 우선 순위는? △답변=사회기여(50.0%), 세금납부(19.1%), 고용유지(18.7%), 이윤획득(11.8%)

△질문2=경제가 잘되기 위해서 잘해야 하는 경제 주체는? △답변=국민(38.8%), 정부(30.0%), 기업(10.9%), 대통령(9.3%)

조사를 맡았던 삼성경제연구소 최호상(崔浩祥) 연구원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기업의 존재이유 등 시장경제의 원리에 대해 정확하게 배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학생들은 왜 이 같은 답변을 했을까? 또 학교에서 경제에 대해 어떻게 배우고 있을까.》

▼관련기사▼

- <2>反기업 정서 왜 생겼나
- <1>한국 땅 떠나는 기업들

▽좋은 기업은 ‘슈퍼맨 기업’?=‘기업은 경제활동에서 얻어진 이윤을 근로자와 형평성 있게 나누고 문화활동이나 장학사업 등에 대한 지원을 통해 기업 이윤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데 앞장서야 한다.’(중학교 사회)

‘기업은 자발적인 봉사와 이윤의 사회 환원을 통해 국가 인류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다.’(고등학교 생활경제)

대한상공회의소 경제교육TF팀은 “국내 초중고교 사회 및 경제교과서를 분석한 결과 상당수의 교과서들이 이처럼 기업의 본질을 잘못 기술한 사례가 많다”고 밝혔다.

심지어 기업과 기업인을 ‘허위 과장 광고나 하고, 불량 상품을 팔며, 몰래 폐수를 버리는’ 존재로 묘사한 대목도 없지 않다.

손영기 경제교육TF팀장은 “기업은 시장에서 이윤추구를 하는 과정에서 고용을 창출하고 경제성장을 주도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사회에 기여한다”며 “사회 환원, 약자 보호, 빈부격차 해소 등도 훌륭한 가치이지만 이를 기업의 본질이라고 보는 것은 큰 오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기업이 교과서가 규정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나쁜 기업’으로 찍히면서 사회 전체에 굴절된 기업관(觀)이 형성된다고 분석했다.

또 많은 교과서가 시장경제체제에서는 제한적인 역할에 그쳐야 할 정부를 ‘전지전능한 능력과 선의를 가진 수호천사’처럼 묘사하는 것도 문제라는 것이 경제교육TF팀의 지적.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교육팀은 이 때문에 중고교에서 경제교육의 정상화와 함께 확대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고교 교육과정에 경제가 선택과목으로 돼 있지만 학생들 사이에 ‘경제는 어렵다’는 인식이 퍼져 경제를 선택하는 학생들은 소수라는 것. 공통과목인 사회에서도 경제 부분은 전체 10개장 중에서 1개장으로 분량에 있어 지리의 3분의 1에 불과할 정도로 비중이 작다.

이와 함께 일각에서는 경제담당 교사들의 상당수도 반(反)기업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회과목 교사들에게 경제 강의를 한 경험이 있는 A씨는 “시장경제에 대해 설명했더니 바로 ‘신자유주의 논리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 아닌가요’라는 반론에 부닥쳤다”며 “과거 정경유착의 경험 탓인지 상당수 젊은 교사들이 기업이나 기업인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서강대 경제학과 곽태원(郭泰元) 교수는 “사정이 이렇다보니 국민들이 돈벌이에 대해 이중적 가치관을 지니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속으로는 중요하게 생각하고 돈을 좋아하면서 겉으로는 초연한 척 하거나 속물적 가치로 치부한다는 것.

▽외국은 이렇게 가르친다=‘사람을 뽑을 것인가, 뽑지 않을 것인가.’

미국 경제교육기관 중 가장 역사가 오래된 JA(www.ja.org) 홈페이지의 ‘원포인트 경제학’ 코너 주제다. 여기에는 세계화가 진척되면서 벌어지고 있는 글로벌 아웃소싱 현상과 기업들이 왜 비정규직 근로자를 고용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들어 있다. 비록 초중고교생 대상의 교육프로그램이지만 접근방식은 경영대학원(MBA)과정의 사례연구를 방불케 할 정도로 구체적이다.

매년 400만명에게 경제교육을 시키고 있는 이 단체는 ‘내 사업 시작하기’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시장경제 시스템을 이해시키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이 때문에 JA 교육생 출신으로 창업에 성공한 기업인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영국도 정부 주도로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을 ‘기업 홍보맨’으로 임명해 학교를 순회하며 기업인과 기업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고 있다. 또 별도 프로그램을 통해 어린 학생들에게 직접 돈을 버는 경험을 제공하는 기업가 체험기회를 마련해 주고 있다.

이 같은 프로그램들을 통해 학생들은 도전과 혁신을 통해 부를 창출하는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을 자연스럽게 익히면서 실제로 직접 창업에 나서기도 한다. 국내 교과서에서는 기업가정신이나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피 말리는 노력을 하는 기업인들에 대한 묘사를 찾아보기 힘들다. 전경련의 ‘영리더스 캠프’ 등 경제교육 프로그램이 있으나 아직은 그 규모가 크지 않은 게 현실이다.

손병두(孫炳斗) 전경련 고문은 “싱가포르의 경우 지난해 국가 이념개혁 목표 7가지를 제시하면서 ‘기업인 존중’을 포함시켰다”며 “한국보다 기업에 대해 훨씬 호의적인 싱가포르에서도 이 같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종식기자 kong@donga.com

▼“기업 중요성 이제야 알았네요”▼

7월 초 경기 용인시의 대웅경영개발원에서 열린 전경련 주최 ‘영 리더스 캠프’ 참가 대학생들이 기업의 역할 등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한국경제를 이끌어온 주요 기업인(삼성그룹 이병철 회장,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SK그룹 최종현 회장 중 두 명을 선택)의 경영철학과 리더십, 경제적 역할에 대해 A4용지 2장분량으로 자기의 견해를 밝히시오.”

7월 4일부터 경기 용인시의 대웅경영개발원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 주최로 열렸던 ‘제3회 영 리더스 캠프’ 참가 예정 대학생들에게 사전에 주어진 숙제 중 한 가지였다.

A대학 경영학과 학생이 제출한 과제물 가운데 한 토막.

“이병철 회장이나 정주영 회장의 이름이나 삼성, 현대그룹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제물 작성을 위해 이들의 자서전을 찾아 읽으면서 이들이 현재의 한국경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휘했던 성실성과 도전정신에 대해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

지난해 여름부터 방학 때마다 열린 이 캠프에는 올해 452명의 대학생이 지원해 105명만이 최종 선발됐다. 서울 및 지방의 대학들과 국립경찰대,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고루 참가했으며 상경계열이 절반, 나머지는 비상경계열이 차지했다.

대학생들은 5박6일의 교육기간 중 △한국경제의 성장과 시장경제의 관계 △기업의 역할 △노사협력과 노동시장에 대한 이해 △시장경제와 정부의 역할 등에 대한 강의를 집중적으로 듣고 이 주제에 대해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또 웅진식품 조운호(趙雲浩) 사장 등 국내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와 딜로이트컨설팅의 제임스 루니 부회장, 서울대 송병락(宋丙洛) 교수 등이 강사로 참가해 강의했다.

교육이 끝난 뒤 B대 정치학과에 다니는 한 학생은 “지금까지 생각했던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해 봐야겠다”는 소감을 남겼다. 캠프에 참가하기 전에 제출한 리포트에서 “시장경제는 사람의 본성에 위배되는 체제로 사회복지를 근원적으로 봉쇄하고 있으며 자본가적 논리로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시스템”이라고 주장했던 학생이었다.

실제로 이 캠프에 참가했던 대학생들은 캠프가 시작되기 전 설문조사에서 77%가량이 시장경제와 기업의 역할에 대해 인식이 불확실하거나 부정적 의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었다. 그러나 캠프가 끝나는 시점에서는 90% 이상이 “기업과 시장경제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게 됐다”며 인식의 변화를 보였다.

행사를 주관한 전경련 국제경영원의 김성훈(金聖勳) 본부장은 “제도권 교과과정에서 시장경제와 기업 활동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교육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금융기관이 주관하는 경제교육 프로그램도 크게 늘고 있다.

삼성생명은 여름방학을 맞아 서울과 부산 등지에서 가입고객의 중학생 자녀 345명을 선발해 2박3일 과정의 ‘경제금융 캠프’를 열었다. 참가한 중학생들은 소득 소비 금융 투자 경제 등을 테마로 한 모의게임 등을 하며 경제에 대한 인식을 높였다. LG투자증권도 여러 차례 어린이들을 상대로 금융캠프를 열었으며, 조흥은행은 청소년금융교육 전담팀을 구성해 전국 10여개 중고등학교를 방문해 금융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교육의 대부분이 ‘금전관리 교육’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한계를 보인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고려대 경영학과 문형구(文炯玖) 교수는 “상경계열이 아닌 학생은 경제학 원론도 채 이해하지 못하고 취업하는 경우가 많다”며 “사회에 진출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업과 시장경제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볼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 확충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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