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이병철/歸農은 축복입니다

  • 입력 2003년 4월 25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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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경남 함안군 ‘숲안마을’로 가는 길은 차가 다니는 길과 재를 넘어 산길로 가는 길 두 가지가 있다. 인구 50만에 이르는 도시 마산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숲안마을로 가는 일반교통편은 하루 두 차례뿐이다. 그나마 오전에는 차편이 없으니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큰길에서 10리를 걸어가야 한다.

귀농운동을 우리 시대의 대안운동으로 시작한 지도 어느새 8년째. 만나는 사람마다 집요하게 귀농을 부추겨 오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오랫동안 제대로 터를 잡지 못했었다. 산 좋고 물 맑은 곳만 기웃거리다가 결국 40가구 남짓이 농사를 짓는 이곳에 자리 잡은 지는 이제 햇수로 4년째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는 ‘귀농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귀농해서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리려면 5년 정도는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화학비료와 농약 때문에 병든 땅을 살려내고, 쓰고 버리는 데만 길들여져 온 습성을 생필품 대부분을 제 손으로 마련해야 하는 생활로 바꿔내는 데 그 정도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내 경우 온전히 정착하지도 못한 채 운동이란 이름으로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더욱 어설픈 귀농이다. 그래도 내게는 이 생활이 축복이다.

귀농이란 단지 농촌으로 돌아감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땅과 가까운 삶, 자연과 함께하는 삶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이 시대의 근원적인 불행은 도시화 문명화를 통해 우리가 생명의 근원인 자연으로부터 철저히 분리 차단됐다는 점이다. 건강은 물론, 인간성의 상실과 공동체성의 붕괴 등 이른바 모든 사회병리 현상들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됐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의 귀농이란 생태적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단순한 직업의 전환이 아니라 삶의 온전한 전환이어야 하는 것이다.

뿌리 뽑힌 삶에서 뿌리내리는 삶으로, 자연을 거스르는 삶에서 자연과 조화되는 상생 순환의 삶으로,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삶에서 생산적이고 살리는 삶으로, 의존적인 삶에서 자립적인 삶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귀농은 귀본(歸本)이요, 귀일(歸一)이다. 농촌, 땅, 자연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머물러야 할 근본자리, 곧 생명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숲안마을로 가기 위해 호젓한 산길의 재를 혼자 넘으며 첩첩이 이어진 산들을 바라본다. 자운영이 붉게 핀 논두렁길을 걸어가며 봄 소풍 나온 아이처럼 마음이 설렌다. 며칠 전 내린 비로 개울의 물소리는 제법 당당하고, 산에는 산벚꽃과 어울려 연둣빛 새순들이 꽃보다 더 곱게 피어난다. 온갖 풀들도 생기 차게 돋아나 저마다 봄을 노래한다. 노랗게 피어난 장다리꽃밭엔 벌들의 향연이 한창인데 장다리꽃의 향기가 이처럼 짙은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귀 기울이지 않아도 들리는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온 산하와 들녘에 가득 차오르는 눈부신 연초록의 물결들. 봄이면 마주하는 우리 농촌 산촌의 풍경인데도 어찌나 아름답고 평화로운지, 절로 가슴이 설레고 뭉클해진다. 비로소 잠자던 나의 오감(五感)이 깨어나 나 스스로 저 새순을 돋우는 나무처럼, 저 맑게 지저귀는 새처럼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문명을 일궈온 우리의 착각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만 알고 그 이전에 자연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도, 살아갈 수도 없는 생태적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데 있는 게 아닐까. 귀농운동의 선배격인 미국의 스콧 니어링은 ‘덜 갖되 더 많이 존재하는 삶’을 꿈꾸며 날마다 발아래 흙과 만나는 즐거움을 노래했다. 두 발로 땅을 딛고 땅이 주는 풍요를 즐기는 삶, 그것이 귀농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나의, 또 우리의 바람이다. 단순소박함 속에서 자연이 주는 풍요를 받아들이는 것에, 살아 있는 충만한 삶을 이루는 비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약력 ▼

1949년 생. 1974년 부산대 재학 중 민청학련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76년부터 가톨릭농민회,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등에서 농민운동과 생태환경운동을 펼쳐왔다. 96년 전국귀농운동본부를 창설, 본부장을 맡아 흙으로 돌아가는 삶을 주창하고 있다.

이병철 전국귀농운동본부장·녹색연합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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