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하의 새로 쓰는 한국문화]<9>농악

입력 2003-04-24 18:23수정 2009-10-10 19:31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농악은 ‘고통스러운 노동’을 ‘즐거운 노동’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한국 민족의 발명품이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한국 민족·민중예술의 하나로 농악(풍물)이 있다. 농악은 지방에 따라 풍물 풍장 걸궁 매굿 농고 상두라고도 불렀다. 외국인들은 농악을 한국민족예술이 독특하게 집약된 대표적 민속 예술로 들고 있다. 농악은 어디서 기원해 어떻게 형성됐을까?》

농악은 ‘두레’에서 기원해 형성, 발전됐다.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대결하는 농업 노동은 고통을 수반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노동’을 ‘즐거운 노동’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한국 민족이 발명해서 농업공동노동과 결합시킨 것이 ‘농악’이었다.

우선 농악에 사용하는 도구와 배역은 ①농기 ②영기(令旗) ③꽹과리(쇠) ④징 ⑤장구 ⑥큰북 ⑦ 작은북 ⑧법고 ⑨태평소(쇄납) ⑩잡색 등이었다.

농기와 영기는 두레와 농악대를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농기는 대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글자를 쓴 세로가 가로보다 긴 깃발이었고, 영기는 두레꾼 또는 농악대를 지휘하는 깃발이었다. 꽹과리 징 장구 큰북 작은북 법고 등 타악기는 악기별로 여러 개를 사용하였다. 태평소는 한국인들이 피리를 대형화하여 발전시킨 한국 농민의 클라리넷이었다.

잡색은 ①무동(舞童· 꽃나비, 성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춤추는 여장한 소년) ②포수 ③중 ④각시(여자로 분장한 남자 무용수) ⑤양반 ⑥창부(무당 차림을 한 무용수 겸 소리꾼) ⑦ 탈광대(탈을 쓴 무용수) 등이다. 이들은 모두 무용수들이었지만, 이 중에서 양반 창부 탈광대는 동시에 재담(주로 코미디)의 연극도 연출했으며 특히 창부는 합창을 선도하기도 했다.

두레 공동노동을 하러 갈 때에는 잡색은 빼고 본 농악만 사용했다. 일하러 나갈 때에는 대오를 편성하여 두레를 상징하는 농기가 맨 앞에 서고 다음에 영기가 뒤따랐다. 다음에 상쇠가 농악대 지휘자로서 ‘길군악’이라는 전투적이며 장쾌한 가락의 행진곡을 치면 부쇠(꽹과리 제2주자) 징 장구 큰북 작은북 소고 법고 태평소의 순서로 모든 두레꾼들이 악기를 따라 연주하며 씩씩하게 출역했다.

농사 작업 도중에는 주로 꽹과리 징 큰북만 사용하여 뒤처진 두레꾼들을 격려, 고무했다. 두 번의 곁두리(새참)와 점심의 휴식시간에도 농악을 울렸다.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일하러 나갈 때와 똑같은 순서로 대오를 편성하여 마을로 돌아오는데, 농악의 잇단 연출로 피곤함도 잊은 채 즐겁고 씩씩하게 돌아왔다.

농악이 극치를 이루는 것은 ‘호미씻이’ 때였다. 호미씻이는 두레의 마지막 김매기가 끝난 후 날을 잡아 벌이는 농민들의 대축제였다. 호미씻이의 농악은 두레꾼들이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꽹과리(쇠) 징 장구 큰북 작은북 법고잡이의 수를 대폭 늘렸다. 다른 잡이들은 고깔을 썼으나 특히 소고잡이와 법고잡이는 상모를 썼다. 상모는 벙거지에 꽃을 달고 상모 위에 ‘돌대’를 붙여서 ‘초리’라는 막대를 달아 돌게 하되, 초리 끝에 길이 3자 정도의 ‘부전지’를 달아 돌리는 모자였다. 맨 끝의 법고잡이는 상모돌리기에 재주 있는 잡이를 임명하여 12발의 긴 부전지를 돌리게 했다.

호미씻이의 농악은 5차원의 집단예술을 연출했다. 즉 ①상쇠의 꽹과리를 선두로 한 타악기와 태평소의 합주 ②가락에 맞추는 선창과 합창 ③잡이들과 잡색들의 각종 집단무용 ④ 잡색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재담과 연극 ⑤상모돌리기와 땅재주를 비롯한 각색 재주놀이 등 5차원의 민족·민중예술이 하나로 배합되어 대농악이 형성됐다.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렸지만, 농악의 집단무용은 매우 발전하여 대표적 매스게임으로서 팔진도법 멍석말이 사통백이 당산벌임 가새벌임 갈림법고 고사리꺾기 등의 집단무용이 모든 호미씻이 농악에서 연출됐다.

일제강점기 캄캄한 어둠의 시대에도 한국 농민들의 장쾌한 농악가락과 튀어 오르는 듯한 씩씩한 춤과 우렁차고 낙천적인 합창은 제국주의자들의 탄압과 착취에 굴하지 않는 한국민족의 불굴의 생명력을 보여 줬다. 호미씻이의 농악을 본 일제 관찰자는 경탄과 질시를 누르지 못해 “조선 농부의 농사는 전적으로 축제의 소동”이라고 기록했다.

조선왕조 후기에 농악은 더욱 분화되어 몇 가지 형태로 발전했다.

첫째는 ‘집돌이 농악’이었다. 정월달이나 농한기에 두레의 농악대가 부농의 집을 돌면서 ‘농악놀이’ ‘마당놀이’를 해주고 기부를 받아 농악기의 구입과 수리 비용에 충당하는 놀이였다.

둘째는 ‘걸립패 농악’이었다. 마을의 농악대가 다른 마을과 장마당까지 나가서 ‘농악놀이’를 해주고 반대급부를 수집하여 농악기의 구입 등에 사용하는 놀이였다. 걸립패 농악은 잡색을 많이 넣고 규모가 크며 ‘굿’농악을 많이 치는 것이 특징이었다.

셋째는 ‘남사당패 농악’이었다. 농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직업적 농악대를 조직하여 장마당과 도시를 순회하면서 흥행을 하는 농악이었다. 잡색을 많이 넣고, 줄타기 땅재주 버나돌리기 광대놀이 꼭두각시 등 재주와 연극을 풍부하게 넣어 흥행성을 높였으며, 판굿의 규모가 크고 화려하고 기예가 뛰어나서 전문적인 무대 연예의 성격을 가진 농악이었다.

넷째는 ‘사물놀이’이다. 광복 후 농악의 실내연주가 필요하게 되자, 최근에 농악 중에서 ①꽹과리(쇠) ②징 ③장구 ④큰북 등 네 가지 타악기만 하나씩 뽑아 농악놀이를 하는 매우 간소화, 축소화된 농악이다.

농악은 한국민족이 고통스러운 노동과 생활을 즐겁게 노동하고 생활하기 위해 지혜롭게 발명하여 발전시킨 독특한 민족 민중종합예술임을 주목하고 더욱 발전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신용하 한양대 석좌교수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