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의 현주소<4>]선행학습 부작용

  • 입력 2002년 5월 6일 19시 06분


《“오늘 배운 ‘분배법칙’을 이용해 ‘7×5.9’를 가장 쉽게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세요.”

“선생님, 양변에 ‘10’을 곱해서 풀면 안되나요. 학원에서 배웠는데….”

3일 오전 서울 강남구 U중학교 1학년 수학시간. 교사가 중학교 1학년 과정의 분배법칙을 설명하고 간단한 곱셈 문제를 냈지만 일부 학생들은 학교에서 미처 배우지 않은 내용을 들먹이며 엉뚱한 대답을 했다. 이 학급 학생 37명 가운데 중학교 1학년 1학기에 배워야 할 내용을 학원에서 미리 배운 학생은 62%인 23명. 현재 단원을 한번도 배우지 않은 학생은 단 4명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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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변에 같은 수를 곱해서 푸는 방법은 다음 단원에서 배우게 될 ‘등식의 성질’에서 배우는 내용이라서 이런 경우에는 맞지 않아요. 이 문제는 분배법칙을 이용하면 간단하게 풀 수 있어요.” 교사가 분배법칙의 개념을 다시 한번 설명해주고 ‘7×(5+0.9)’ ‘7×(6-0.1)’ 등 다양한 해법을 소개하자 그제서야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영수(姜榮守·여) 수학 교사는 “학원에서 미리 배운 내용들이 뒤엉켜 있어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다”며 “답만 구하는 요령에 익숙한 학생일수록 창의력과 응용력에 필요한 기본개념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일선 교사들은 학원에서 학교 진도를 앞질러 공부한 학생들이 기본개념이나 과정을 무시하거나 수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학업성취도는 물론 교육적 측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날 오전 서울 강남구 도곡동 언주초등학교 5학년 수학시간. 분수의 덧셈과 뺄셈을 배우는 시간이지만 일부 학생들은 교사의 설명보다 연습 문제를 푸느라 더 바빴다.

이 학급 학생 42명 중 40명이 수업 시간에 배우고 있는 단원을 학원 등에서 미리 배웠다고 대답했다.

백모양(11)은 “4학년 때 5학년 과정을 이미 다 배웠기 때문에 학교 수업이 시시해 너무 지루하다”면서도 “그런데 시험을 보면 왜 만점을 맞지 못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백미녀(白美女·여) 교사는 “6학년 수학을 미리 배운 5학년 학생 7명 가운데 5명은 수학시험이 80∼90점대에 불과하다”며 “기본개념을 차근차근 이해해야 하는 데 문제풀이식 학원 수업에만 익숙해 문제를 약간만 틀어도 어려워한다”고 말했다.

항상 학교 진도보다 앞서 배우다 보니 학생들은 학교 수업보다 학원을 앞세운다. 서울 강남구 Y초등학교 6학년생 307명 가운데 현재 학원에 다니지 않는 학생은 단 4명에 불과했다. 수학은 233명(76%), 영어는 243명(79%)이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이 학교 김국진(金國鎭) 교무부장은 “학습 수준이 제각각인 학생 30명을 함께 가르치려다 보니 어려움이 많다”며 “수업시간에 학원 숙제를 하거나 학원 문제집을 푸는 학생들도 많다”고 말했다.

교사들은 학원을 학교 교육의 보완 수단으로 활용해야 하는데 학교가 학원을 뒤쫓아가고 있다고 걱정하고 있다.

서울 Y중학교는 이번 주 중간고사를 앞두고 방과후 특기적성 수업을 빠지고 학원에 가는 학생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10명이 배우는 원어민 영어회화 수업의 경우 지난주 참석자가 1명에 불과했다. 인근 학원에서 학교 중간고사에 대비해 기출문제 풀이 특강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선행학습 학생의 비율이 높은 강남지역의 학교에서는 학교수업이 선행학습을 한 학생들의 눈높이에 따라 진행되는 바람에 학원에 다니지 않는 학생들이 오히려 소외되고 있다는 것.

서울 강남의 한 고교 수학 교사는 “학생들의 70%가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이들 학생들의 수준에 맞춰 수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며 “하위권 학생들은 진도를 따라가지 못해 수업 시간에 졸거나 딴전을 피운다”고 말했다.

고교의 경우 대입에서 내신성적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학원의 기출문제에서 벗어나 시험 문제를 출제하기도 어렵다. 원리를 응용한 문제를 출제하면 “시험 범위를 벗어났다”는 학부모와 학생들의 항의가 빗발치기 때문.

서울 단국대 사대부속고교 유수열(柳壽烈) 교무부장은 “중학교 때 이미 고교 수학을 배워 적분을 곧잘 하는 학생도 기본 원리를 물어보면 쩔쩔맨다”며 “선행학습은 문제풀이를 반복 훈련하기 때문에 단기적인 성적 향상은 모르지만 학업 성취도를 높이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 이준순(李俊淳) 장학사는 “학원에서 미리 공부한 학생들이 학교 수업을 소홀히하는 것도 공교육 위기의 한 원인”이라며 “한 단원 정도의 예습은 모르지만 한 학기나 몇개 학년을 뛰어넘는 선행학습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학원의 선행학습은 사제간의 관계까지 왜곡시키기도 한다. 이미 학교 수업에서 진행될 내용을 배워온 학생들이 교사의 수업을 우습게 여기거나 아예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경우도 많다는 것.

서울 K중학교 김모교사(여·국어)는 “수업 태도가 불량한 학생에게 주의를 줬더니 ‘학원에서 다 배운 것을 또 배워야 하느냐. 학교시험은 80점 이상 될테니 걱정말라’고 대들어 어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박용기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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