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속으로]'이 성스러운 장소에서' 칠레 젊은이의 열정

  • 입력 2000년 10월 13일 18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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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카날레스라는 중년 남자가 산티아고 중심가 극장에서 혼자 영화를 보고 화장실에 들러 용무를 보던 중에 갑자기 전기가 나간다. 침착하게 용무를 마치고 어둠을 더듬어 문에 다다른 순간 그는 화장실에 갇혀버렸음을 깨닫는다.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했지만 소용이 없자 마음을 진정하고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여 적응하기로 한다. 그는 우선 화장실벽의 낙서를 읽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 성스러운 장소에서/ 가장 겁 많은 사람들은 용을 쓰고/ 가장 용감한 사람들은 똥을 눈다.’

화장실 낙서에는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암울한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때는 살바도르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이 수세에 몰린 시기, 미국의 지원을 받은 우익세력이 파업과 테러로 칠레 사회를 혼란에 빠뜨려 궁핍과 불안과 재난이 일상사가 되어 있던 시기이다. ‘이 성스러운 장소’에 갇힌 삼 일 동안 카날레스는 아옌데 정권이 군부에 의해 전복되는 사태가 일어났음을 모르는 채로 과거에 대한 회상에 빠져든다.

폴리 델라노의 ‘이 성스러운 장소에서’는 라틴아메리카판 교양소설이라고 부름직한 특징을 갖고 있다. 시골 발디비아에서 출세의 꿈을 품고 산티아고로 올라온 카날레스의 행로는 쥘리앙 소렐이나 라스티냑의 그것과 형식상 유사하다. 교양소설의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카날레스는 도시의 거대한 세계와 하나가 되는 가운데 자아 형성의 고단한 과정을 밟는다. 방탕한 유흥과 연애, 대중정치의 체험, 제비족 생활, 우발적인 살인과 이후의 도주 등과 같은 ‘엉망진창의 삶’을 거치면서 카날레스는 자신에 대한 배반, 사회에 대한 반항의 정열을 불태운다. 그는 결국 자신에게 약속되어 있었던 부르주아적 안락을 포기하고 열성적인 사회주의자가 된다. 그의 행로는 냉전 체제하의 칠레 사회에 대한 환멸과 아옌데의 집권으로 상징되는 혁명의 희망이 젊은이들에게 가져다준 방황과 모험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카날레스는 신념의 인간이라기보다는 정열의 인간이며, 그의 행동은 합리적이라기보다는 충동적이다. 그는 바람둥이 여자에서 사회주의 맹렬여성에 이르는 다양한 여자들과 사랑에 빠지고 스스로 기획하는 삶보다는 우연의 은총에 기대는 삶을 산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이 그의 정신적 편력을 하찮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통념과 다르게 인생을 상상하는 젊은이 특유의 능력과 열정을 풍부하게 보여준다. 카날레스는 혁명이 나타내는 우발성, 광포함, 축제성을 스스로 살고 있다 해도 좋을 것이다. 그의 독특한 성격이 라틴 아메리카인들의 기질이 투영된 결과인지 아니면 한순간 혁명에 대한 기대가 살아 있던 특수한 사회의 산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성격에는 젊음의 파노라마적 역동성이 구현되어 있다.

‘이 성스러운 장소에서’는 이른바 ‘붐’이라는 라틴아메리카 소설 사조가 물러간 이후에 나온 작품이다. 폴리 델라노는 ‘붐’ 이후의 세대, 즉 단명했지만 영웅적이었던 사회주의 실험을 기억하면서 압제의 악몽과 싸우고 있는 작가군에 속한다. 그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지난 시대 우리들 자신의 정치적 체험을 상기하게 된다. 카날레스와 그 밖의 젊은 인물들의 이야기 곳곳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80년대 젊은이들의 신음과 함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이 성스러운 장소’에 표현된 사회주의는 이제 비록 사상적으로 낡았다 할지라도 자신의 존재를 보다 넓은 공동체와 일치시켜가는 그 작중인물들의 편력은 뜻밖의 감회를 선사한다. 폴리 델라노는 환 파블로라는 사회주의자의 입을 빌려 칠레사회를 풍자하는 가운데 ‘상상력’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의 암시에 따라 말하건대, 상상력을 가진 인간 최고의 임무가 어떤 새로운 인간 공동체를 꿈꾸는 일임에는 변함이 없다.

▼'이 성스러운 장소에서'/ 폴리 델라노 지음/ 송병선 옮김/ 책이있는마을/ 260쪽/ 8000원▼

황종연(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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